비타민 시++ /옴니버스연습장 1157

거대한 병원 -24.3.16.(토)

거대한 병원 -박원주- 병원에 점심 대기가 길어 막막했더니 푸드코트 쿠폰 하나에 위로를 받는다. 병원 뷔페인데 너무 맛있다. 이래서 사람들이 많이 오나? 정원도 놀이터도 너무 이쁘다. 이래서 사람들이 많이 오나? 병원도 바깥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기다리는 사람들도 너무 멀쩡해 보였다. 아픈대도 모두 멀쩡한 척 살았구나. 조금이든 많이든 모두 아팠구나. 죽어가는 인생이 아픈 건 당연하겠지. 모두가 병원에 꼭 와야했구나. 조금씩 자라는 무언가가 날 침노하기 전에 매일 침상에 날 누이고 진찰해봐야겠다. 몸을 고치듯 생각을 고치고 병원 정문을 나서는데 세상이 마치 거대한 병원같다. * 와이프가 아파서 병원가서 기다리고 간김에 아이 감기도 진찰하고 이도 치료하고 병원에서 반나절을 보냈다.

면접관 -24.3.15.(금)

면접관 -박원주- 천국 입구를 센캐가 지키고 있다. 면접 후 합격자만 들어갈 수 있다. 어떤 기준으로 들어가는지는 모두 알지만 그 기준에 맞는지는 센캐들만 알았다. #1차: 너 자신을 알라 당신은 누구인가요? 네. 저는 서른살 서울 박아무개입니다. 그게 다인가요? 네. 뭐가 더 필요한가요? 탈락입니다. 왜죠? 중복자 탈락입니다. 자신을 더 자세히 알고 차별화해서 지원하세요. #2차: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외모, 학력, 제력, 성격, 열정.. 모두가 자신을 자랑하기 바쁘다. 능력만큼 오해가 많은 단어가 없구나. 무언가 많다는 건 뭔가는 적다는 반증. 가진만큼 더 절실하지 않기에 착하고 충성되지 못한 그들은 모두 탈락했다. #3차: 카멜레온 색출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지원한 사람이 있구나. 당신은 이곳에..

정적을 없애다 -24.3.14.(목)

정적을 없애다 -박원주- 가장 작은 입이 제일 시끄럽다. 눈도 귀도 정적이 싫어 떠드는 입을 가만히 듣고있다. 정적이 흐르면 자신을 쳐다볼까봐 어수선한 머리속을 들여다볼까봐 빈 가슴속에 손을 넣을까봐 쉴새없이 떠드는 입으로 자신을 가렸다. 날씨가 우중충해서 우울증 걸리겠다는 둥 오토바이 타다 경찰에 걸려 벌금을 냈다는 둥 바다에 둥둥 입만 동동 띄운 채 벌거벗은 나는 절대 꺼내지 않았다. 머리가 됐다 다리가 됐다 입이 분주하다. 입이 떠들고 입이 웃고 나를 먹고 서로를 먹고 우리를 먹었다. 모든 연기를 마친 입은 우리를 꼭 담은 채 자신이 머물던 정적 속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그토록 싫어했던 정적을 나들은 그토록 사랑하게 되었다. 허기진 입이 또 글감을 우걱우걱 쑤셔넣으며 다음 만날 우리를 준비하고 있다..

기브 앤 테이크 -24.3.13.(수)

기브(give) 앤 테이크(take) -박원주- 세상만사 기브 앤 테이크. 주거니 받거니 오고 가는 거래가 정확히 딱딱 맞다. 물물교환. 세상만사 기브 앤 테이크. 단순한 공식인데 까먹고 있었구나. 난 무얼 주고 받을까? 넌 무얼 주고 받을까? 열리는 시장이 웅성웅성 요란하다. * 나라간 공식 행사에 참여하면 거래가 시작된다.

정의의 사도 -23.3.12.(화)

정의의 사도 -박원주- 어두운 밤. 쉿 아무도없다. 이제 내가 나설 때구나. 세상에 악을 이제 뿌리뽑겠다. 짧은 심판 후 갈아둔 칼날로 소심한 응징을 한다. 저놈이 악이다. 저놈 잡아라! 긴긴 밤을 쉴새없이 달리며 악을 악으로 갚는다. 악은 질긴 놈이군. 밑 빠진 독에 물붓듯 없어지지 않는다. 그 독에 콩나물처럼 어느새 가득찼다. 밤을 지샌 나만 피곤하다. 나만 피곤하게 밤을 지새고 말았다. 악을 위한 정의의 투자가 많이 과했다. 어짜피 망할 놈 잠시 심판을 보류해야지. 심판은 신에게 맡기기로 했다. 정의가 가볍도록 자유를 줬다. 긴긴 밤 다시 단잠을 청했다. * 세면장에서도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어 소심한 복수를 했다. 악을 악으로 갚는건 부담스럽다.

유월절 그밤 -24.03.11.(월)

유월절(pass over) 그밤 -박원주- 문설주에 피를 바른다. 누구 피인지 출처는 모르지만 어디서 맡아 본 냄새가 내 피냄새같다. 피가 흐르는 건 신경쓰이지 않았다. 부디 이 문제가, 이 닥친 재앙이 무사히 넘어가길 기도할 뿐이였다. 오늘 밤만 넘기면 된다. 이 어두움만 지나면 된다. 꿈같은 하룻밤 이 밤만 넘기면 된다. 이 죽음만 한번 넘기면 험난했던 여정도 이젠 내리막길이다. 이 밤이 깊구나. 이 밤이 길구나. 가지않는 밤이 째각째각 심장소리만큼 요란하다. 오늘밤만 넘어가거라. 이 어두움만 지나가거라. 이 밤만 넘어가거라. 이 문제만 이 재앙만 이 죽음만 넘어가거라. 내일 아침 여명을 내게 밝혀 다오. 이 밤이 깊다. 이 밤이 길다. 가지않는 밤이 째각째각 심장소리만큼 요란하다. * 여러 문제들이..

노력하는 가지-24.3.10.(일)

노력하는 가지 -박원주- 멋진 열매를 맺으려 노력을 했다. 피나는 노력에도 아무런 열매도 열리지 않았다. ‘뭐가 문제일까?’ 난 고민에 빠졌다. 그때 나무가 말했다. ”열매는 내가 맺을꺼야. 넌 딴 생각 말고 내게 붙어만 있어. 다음 가을이 오면 열매를 맺을꺼야.” 난 줄기에 꼭 붙어 다음 가을을 기다렸다. 붙어있는 건 참 쉬운 일이다. 떨어지지만 않으면 됐다. 열매를 맺으려 애쓰지 않아도 됐다. 봄이 와 싹이 나고 여름에 꽃이 피고 가을에 마침내 열매가 열렸다. 난 열매가 신기하기만 했다. 추운 겨울이 와도 난 줄기에 꼭 붙어있었다. 서로 믿고 붙어있으면 다 되었다. 서로 친해 하나면 그걸로 끝이였다. * 다른 교회 목사님이 오셔서 나무와 가지 비유로 열매맺는 비법을 설명하셨다. 결국 예수님께 붙어서 ..

웃는상 -24.3.9.(토)

웃는상 -박원주- 그를 만나면 항상 웃고있다. 웃어서 웃는 줄 알았더니 그냥 웃는상이다. 어린 아이가 해맑은 것처럼 그렇게 웃는다. 모두가 무표정할 때쯤 그는 왜 아직 웃고 있을까?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을텐데.. 인생이 그리 즐겁진 않을텐데.. 왜 아직도 그는 해맑게 웃고 있을까? 나도 항상 해맑던 때가 있었지. 매일이 즐겁고 신났을 때가 있었지. 세상이 어느순간 내게 ”웃지마!“ 했을때 난 내가 뭘 잘못한 줄 알고 뚝! 웃음을 그쳤지. 그는 계속 웃기로 결정한거지. 그는 계속 해맑기로 선택한거지. 슬픈 이유를 멀리하기로 맘먹은거지. 미친 것처럼 계속 웃자고 다짐한거지. 항상 웃는 법을 나도 알아. 누가 왜 사냐고 물을 때 항상 기쁘려 산다고 답하는거지. 기쁨에 우선순위를 먼저 두는거지. 이유를 찾아서..

지문 LP -24.3.8.(금)

지문 LP -박원주- 내가 책임지고 내가 살아야해서 내삶 곳곳에 내 흔적이 묻었다. 떠넘길 수도 대신 할 수도 없어서 내삶 곳곳에 내 지문이 남았다. 내 손이 한 것들을 더듬다 문득 손가락 지문을 바라다본다. 내 살색을 닮아 투명한 주름. 보일듯 말듯 수많은 굴곡. 미로 속 퍼즐을 풀고 헤치며 돌고 돌고 멈추고 또 그리며 어느 탄생부터 알수없는 끝으로 나아가고 있다. LP 레코드판처럼 지문을 더듬어본다. 가사도 없이 막 새겨진 줄 알았더니 어떤 노래가 술술 흘러나온다. “난 나야” “나는 특별해” “내 인생은 내 꺼야”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 내 인생의 굴곡들이 노래를 한다. 들리는 굴곡이 그저 맛나고 향기로워 장단에 눈을 감고 추억을 음미한다. 누군가 책임져주길 바랬지만 아무도 책임져주는 않아 버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