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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πr[15] 오솔길 단골 손님

오솔길 단골 손님 박원주 이 고요한 시골 밤중 말없는 오솔길은 거니는 내가 단골인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어릴 적 산딸기 따먹던 가벼운 발걸음과 세월 속 풍파에 지친 발걸음의 무게를 다르게 느끼면서 다독거리고 있을까 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제 빛깔이 다르듯 이 작은 시리우스 내가 남긴 흰 발자취를 다녀간 수많은 걸음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까 앞서 걸어간 훤칠한 공룡의 큰 발자국. 말없이 다가서서 손끝으로 쓰다듬어 본다. 나비날고 들꽃잎 떠돌던 길에 지친 발을 띄우고 눈물로 발을 씻기던 마리아의 머릿결 따라 이 밤중 외딴 오솔길을 반딧불과 떠돈다

2πr[14] 매실꽃눈

매실꽃눈 박원주 한 겨울 엄동설한 추위가 한창인데 매실나무 찬가지마다 꽃눈 이슬이 맺혀있다 저 먼 대지끝 봄 녹는 소리에 깨어 이 매운 겨울한파에 여린 손을 내밀었구나. 눈소리가 고요한데 무얼 듣고 눈을 떳노 아직도 날이 찬데 무얼 보고자 눈을 떳노 고운 짚 흙담녘 앉아 태양볕을 쬐어도 매달린 아침이슬이 애처롭기만 하구나. 냉이꽃 나비날고 햇병아리 노래하려면 눈녹고 개울울어 한참을 자야하니 여린 손 다소곳이 기다려 피어 보거라

2πr[13] 종이 피라미드

종이 피라미드 박원주 자본계약설. 쓰잘없는 종이가 존엄한 지폐로 탈바꿈하다. 동그란 세상에 세워졌던 네모들의 통치는 보이지 않는 세모들의 침략에 막을 내렸다. 다시 도래한 신석기시대. 벌거벗은 본능의 발톱을 세우고 거대한 바벨탑 피라미드를 오른다. 으르렁대는 포식자 이자(利子). 군대 군대 도사린 증권의 혓바닥. 성공의 정상아래 쓰러져 나뒹구는 욕망의 사마리아. 욕망의 제물에 피라미드는 진화한다. 누구도 깰 수 없는 *지동설(紙動說)을 따라 감미로운 스핑크스의 제단이 쌓여 올라간다. 질식해 꺼져가는 엔트로피 속에서도 피라미드의 푸르른 사막은 부드럽게 작열하고 있다. 아득한 이드(id)가 범람하는 나일강. 젖과 꿀이 피흐르는 거대한 제국 피라미드. *지동설(紙動說)-종이가 세상을 움직인다는 현대 경제학파의..

2πr[12] 시멘트 나무위에서

시멘트 나무위에서 박원주 견고한 문명이 세워진 도시 사막의 강 곁에는 죽순같이 시멘트 나무가 대지를 뚫고 자란다. 가지도 잎도 없는 간략한 생명의 성장. 바다에 모래 씨앗을 반죽해 높다란 긴 해변을 세워다 놓는다. 간만에 하늘이 전하는 바다의 빗소리에 나무속에서 구부정한 벌레들이 웅성 되기 시작한다. 용케도 한 마리 벌레가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 저 멀리서 불어오는 미역 내음을 맡고 있다. 어디선가 내리는 싱거운 바다. 허기져 메마른 몸으로 죽 들이켜 보지만 다 자란 네모난 줄기는 옆으로만 퉁퉁 불을 뿐이다. 어느덧 나무껍질 속에서 속삭이는 바닷물의 소리 빈 공간 속 추억 사이로 침식의 파도를 철썩 울린다. 울리는 고동소리에 미역꽃을 피우고 파도 소금같이 하얀 옛 추억의 뿌리를 빗물 속에 녹여 간을 맞출 ..

2πr[11] 할미꽃 수레바퀴

할미꽃 수레바퀴 박원주 양지바른 무덤가 메마른 잔디사이 심심한 할미꽃이 쪼그리고 앉아있다 같이 나도 쪼그려 앉아 휜 허리를 펴드리며 백발 뒤에 숨겨진 눈동자를 찾아본다 할매는 주글주글한 젊은 추억을 보듬고 심심한 세월의 장단에 맞추어 흐뭇한 반추의 미소를 짓는다 누군가 앗아간 푸르른 세월이 얄밉게 한스럽고 후회스러울 텐데 시들어 져갈 날도 멀지 않았을 텐데 굽은 허리에 거대한 수레를 끌고 이 무덤 저 무덤 기웃 거리며 넋들이 남기고간 추억의 고물을 줍고 있다 허풍쟁이 약장수 세월에 투덜거리다가도 떨어진 추억의 사탕을 주울 때면 밀봉된 그 껍데기의 신선한 딸기그림마냥 한없이 천진한 얼굴로 웃음꽃을 피운다 양지바른 무덤가 메마른 잔디사이로 심심한 할미꽃이 덜컹 거리며 세월의 빈 수레를 굴리고 있다

2πr[10] 사우나에서 울다

사우나에서 울다 박원주 메마른 세상을 거닐다 차(茶)처럼 마음을 우려내고 싶을 때 따뜻한 사우나 속에 몸을 담그고 온 몸으로 뜨거운 땀을 머금어 낸다 별처럼 하나둘 맺히는 땀방울. 피부의 굴곡을 읽으며 중력을 따라 마루 바닥사이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미련도 없이 떨어지며 스미어 사라진다 내가 진정으로 흘리고 싶었던 눈물의 땀방울. 눈이 아닌 온몸으로 펑펑 울어 재낀다 나는 왜 좁은 눈 사이에 눈물을 가두고 한 줄기 흐르는 눈물로 기쁨을 맞았던가 삶속에서 더 많은 땀방울로 울어 지내리... 온 몸으로 눈물 흘리며 울어 보내리... 사우나 온기에 맺혀진 땀방울을 눈물처럼 손모가지로 쓸어 내린다

2πr[9] 그네가 쉬는 숲

그네가 쉬는 숲 박원주 머언 시골길 돌아 태양만이 자는 숲. 어리숙한 두 바늘 나무에 그네가 거꾸로 달려있다. 잠자던 그네에 앉아 살며시 인생의 무게를 달자 침묵하던 시간의 추가 이내 흐른다. 매달린 두 팔로 메마른 추억 속 레코드판을 쓰다듬으며 고였던 신원(伸寃)의 눈물을 쏟아 흘리는 그네의 자취. 저 푸른 창공 속으로 제 몸을 적시고 파도 가고픈 알프스 초원, 지평선 끝을 달리고 파도 날아갈 수도 디딜 수도 없이 지쳐버린 그네의 영혼. 외딴 시골길 태양만이 자는 숲에는 하늘과 땅을 그리는 그네가 쉰다.

2πr[8] 숨겨둔 사진 뒷이야기

숨겨둔 사진 뒷이야기 박원주 안개 낀 아침 호숫가 물고기가 하품하는 소리. 해뜨는 언덕에 올라 철새들의 힘찬 날개짓에 셔터를 파다닥 누른다. 차알칵 소리에 꺾이어지는 풍경의 영혼. 영원히 살으라고 필름 화병에 차곡 구기어 담는다. 3차원을 소유하고 픈 2차원의 인상파. 빠른 미(美)의 복사에 차원의 경계는 무너져 내린다. 절대로 웃지 않는 소녀의 웃음과 찬 겨울에도 낙화하지 못하는 코스모스 꽃과 영원히 흐를 수 없는 폭포수를 떠받친 작은 필름 액자의 무게. 늘 지나던 대나무숲 암자에 앉아 바람이 세는 풍경소리를 같이 그리며 세어 본다. 솨아아 댕그렁~땡. 차알카악. 이제 침묵하는 처마 끝 저 풍경은 어언 바람이 휘돌며 흔들어 주려나. 까만 동공 속 거리를 거니는 인상파의 후예들. 2차원의 네모난 추억 속..

2πr[7] 탱자꽃 무성히 피던 날

탱자꽃 무성히 피던 날 박원주 탱자나무 가시가시 사이로 탱자꽃이 무성히 피던 날 맨 가슴으로 여린 꽃들을 꾹 껴안아 봅니다 하이얀 꽃잎들이 태양을 향해 기지개를 펼 때 다섯 꽃잎 하나씩 대견스럽게 쓰다듬어 줍니다 노랗게 해 담은 스물셋 파도들이 커다란 바다속 빛나는 등대를 보며 보리수염 간질이며 젊은 날을 보내고 있네요 언젠가 가시로 빈 담장을 외로이 지키며 사랑을 거부하며 아파한 나날들. 고드름처럼 자랐던 한 겨울날의 가시들이 피어나는 꽃과 함께 서서히 녹고 있네요 가시틈 비집고 하얀 손을 내미는 먹지도 못하는 새큼한 탱자의 향. 이제는 그 날을 잊고 누군가를 고대하며 촌스런 탱자꽃을 가만히 틔워 봅니다 빈 가슴 흠뻑 가시에 취해 마음껏 사랑하며 마음껏 아파하며 시들어가는 탱자꽃을 사랑해 봅니다.

2πr[6] 채널 666

채널 666 박원주 채널이 지배하는 눈을 뜬 세상. 인간이 바라는 욕망의 숫자는 인간의 눈이 보고자 하는 채널의 숫자. 문명이 낳아버린 이기의 환상들. 구속이 사라져 버린 자유로운 욕망의 시대. 향기론 채널은 거미줄을 피우고 욕망이 바라보는 시선의 초점들을 유혹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거미의 침묵 속에 발버둥도 없이 걸리어 있는 말없는 눈동자들. 해맑던 수정체는 어느새 낙엽처럼 어두운 구천으로 떨어져 내린다. 지혜있는 자는 채널의 수를 세어보라. 눈있는 자는 그 뜬 눈을 감으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메아리쳐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