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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πr[21] 비와 선인장

비와 선인장 박원주 비가 내린다 발걸음의 사막에 내리는 간만의 홍수. 비에 빠져 죽을까봐 우산의 배를 탄다 -선인장과 비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물의 두 가지. 시나브로 나를 떠나 하늘과 동거하던 비가 다시 내게로 내리는 이유는... -세례(洗禮) 내리는 빗물과 수직으로 내달리며 이제껏 가두었던 진실의 땀을 마음껏 흘린다. 태양에 말라 지친 심성(心性)의 눈가를 촉촉이 적신다. 사막의 선인장처럼 벗어던지는 나의 잎. 일생에 한번뿐인 노아의 홍수처럼 증오하는 모든 자취를 기별없이 씻어 버린다 비가 그친다 짧았던 생(生)을 마치고 발현(發顯)하는 비의 영혼. 또 잊혀져 시들어 버릴 빗살무늬 약속들.

2πr[20] 호수을 따라 돌며

호수을 따라 돌며 박원주 푸른 호수가 맑은 하늘이 내려와 고여있다 호숫가를 따라 굴러다니는 조약돌을 밟으며 펼쳐진 호수의 크기를 가늠해 본다 바람을 따라 일렁이는 물결은 복조리가 쌀을 일렁이듯 열심히도 대지를 때리고 있다 눈부신 햇살이 찰랑거리며 수면에 반사되자 갖혀져 있던 나의 경계가 딱딱한 눈을 뜬다 바다... 이 좁은 산맥 외톨진 곳에도 그 숨소리가 고동치는 대양의 바다. 바늘에 고래라도 잡을 듯이 내가 낚시추를 던지는 것은 그 넓은 숨결이 한없이 그리워서리라 내가 이 긴 호숫가를 마다하지 않고 돌아오는 이유도 드넓은 바다를 돌았다는 동경이 착각이 되기 때문이다 철썩이는 파도가 고이는 외진 숲길 그속에서 미역처럼 붙어서 휴식을 취한다 이 푸른 바다에 사는 생선의 맛이 그리워서 삽겹살이라도 구우며 구..

2πr[19] 진화의 믿음

진화의 믿음 박원주 무에서 유가 생기자마자 곧 진화가 시작된다 열역학 제2법칙을 거스르는 열역학 반역의 법칙. 거대한 우주는 세포를 만들기 위한 준비물을 모은다 아미노산 DNA 미토콘드리아 핵 그따위들. 생명이란 마법을 세포에 걸자 세포는 스스로 기어 다니며 놀아 쌌는다 배가 고프면 옆의 놈을 잡아먹을 줄 아는 기특한 진화. 그래 이제 아메바를 벗고 나로 진화하는 거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재일지니. 단세포는 다세포로 핵융합을 시도한다 어느새 물속을 유유히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의 창조 아니 진화. 물속의 푸른 낭만도 진화를 꿈꾸는 고기의 야망을 꺽지는 못했다 H2O에 실증이 난 고기들은 즐거웠던 부푼 부레를 버리고 알록달록한 패션감각을 가진 개구리가 되기로 작정을 한다 물의 압력에 짓눌려 살 필요도 없..

2πr[18] 맹이 누나야

맹이 누나야 박원주 우리 옆 마을에는 맹이 누나가 산다 외할머니 댁을 방문할 때면 언제나 해맑은 맹이 누나 돈을 달라는 듯 공손히 손을 모을 땐 난감한 듯 쳐다볼 밖에 어린 나는 별도리가 없었다 가끔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춤을 출 때면 웃어야 할지 도망을 갈지 난감해 했었다 정상이 아닌 정상을 향한 우리의 몸부림 속에 낙오의 딱지를 붙이고도 즐겁게 인생을 살아가는 누나. 돌아오는 길 좁은 골목길에 아직도 앉아서 하루가 가는 걸 누나는 또 지켜보고 있다 무력한 자신을 알기는 할까 알 수 없는 신의 뜻이 원망스럽긴 할까 아니면 매정한 세상에 억장이 무너질까... 웃으며 웃음짓는 주름진 눈가 떡 벌어진 입에서 침이 주르륵 흐른다 나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 침과 함께 내 눈물도 흘러 내린다 정상을 향해 오를 수없는..

2πr[17] 물의 목소리

물의 목소리 박원주 흐르던 물이 침묵하다 고요한 물들을 잠깨운다 가로 세로의 물이 만나 고요하게 울리는 소리의 숲. 투명하게 숨어있던 목소리들이 무지개처럼 나뉘어 흘러내린다 고요히 퍼지는 물. 과감히 떨어지다 요염하게 패이는 물. 천방지축 말괄량이 튀어올라 구르는 물. 오랜만의 봄비에 자신을 알리느라 작은 소리들이 소란스레 분주하다 투명함에 잊혀졌던 그들의 얼굴. 내 삶속에 지나간 추억의 방울들이 튀어 오르는 물방울처럼 스치며 지나간다 고요한 밤의 동굴에 누워 저마다의 소리를 따라 숨겨진 얼굴을 그리어 본다

2πr[16] 시장한 시장

시장한 시장 박원주 내가 가끔 다니는 버스편에는 문도 없이 왁자지껄한 분주한 시장이 있다 그 곳에는 내 심장을 새롭게 뛰게 하는 갓 무쳐진 삶의 시장함이 있다 그 곳에선 주름 많은 할머니도 열심히 장사란 걸 하기에, 찬송가를 틀며 바닥을 기는 아저씨의 돈통도 채워져 가는 곳이기에, 이 젊은 가슴이 주욱 펴지며 생의 눈망울이 초롱 커진다 뜨거운 일상의 증기 속에도 나를 반겨주는 순대가 사는 곳. 불어 터져가는 잡채를 안은 순대는 흘리는 피도, 죽어버린 내장도, 심지어 내 고독까지도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생의 소중함이라 외쳐 댄다 클래식하게 찐하게 울리는 번데기의 냄새. 주글주글한 내 마음의 시름도 구수한 번데기 국물마냥 시원스럽게 펴진다 가판대 모여 앉아 수다 떠는 새큼한 다래들은 시들어가는 세상 ..

2πr[15] 오솔길 단골 손님

오솔길 단골 손님 박원주 이 고요한 시골 밤중 말없는 오솔길은 거니는 내가 단골인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어릴 적 산딸기 따먹던 가벼운 발걸음과 세월 속 풍파에 지친 발걸음의 무게를 다르게 느끼면서 다독거리고 있을까 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제 빛깔이 다르듯 이 작은 시리우스 내가 남긴 흰 발자취를 다녀간 수많은 걸음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까 앞서 걸어간 훤칠한 공룡의 큰 발자국. 말없이 다가서서 손끝으로 쓰다듬어 본다. 나비날고 들꽃잎 떠돌던 길에 지친 발을 띄우고 눈물로 발을 씻기던 마리아의 머릿결 따라 이 밤중 외딴 오솔길을 반딧불과 떠돈다

2πr[14] 매실꽃눈

매실꽃눈 박원주 한 겨울 엄동설한 추위가 한창인데 매실나무 찬가지마다 꽃눈 이슬이 맺혀있다 저 먼 대지끝 봄 녹는 소리에 깨어 이 매운 겨울한파에 여린 손을 내밀었구나. 눈소리가 고요한데 무얼 듣고 눈을 떳노 아직도 날이 찬데 무얼 보고자 눈을 떳노 고운 짚 흙담녘 앉아 태양볕을 쬐어도 매달린 아침이슬이 애처롭기만 하구나. 냉이꽃 나비날고 햇병아리 노래하려면 눈녹고 개울울어 한참을 자야하니 여린 손 다소곳이 기다려 피어 보거라

2πr[13] 종이 피라미드

종이 피라미드 박원주 자본계약설. 쓰잘없는 종이가 존엄한 지폐로 탈바꿈하다. 동그란 세상에 세워졌던 네모들의 통치는 보이지 않는 세모들의 침략에 막을 내렸다. 다시 도래한 신석기시대. 벌거벗은 본능의 발톱을 세우고 거대한 바벨탑 피라미드를 오른다. 으르렁대는 포식자 이자(利子). 군대 군대 도사린 증권의 혓바닥. 성공의 정상아래 쓰러져 나뒹구는 욕망의 사마리아. 욕망의 제물에 피라미드는 진화한다. 누구도 깰 수 없는 *지동설(紙動說)을 따라 감미로운 스핑크스의 제단이 쌓여 올라간다. 질식해 꺼져가는 엔트로피 속에서도 피라미드의 푸르른 사막은 부드럽게 작열하고 있다. 아득한 이드(id)가 범람하는 나일강. 젖과 꿀이 피흐르는 거대한 제국 피라미드. *지동설(紙動說)-종이가 세상을 움직인다는 현대 경제학파의..

2πr[12] 시멘트 나무위에서

시멘트 나무위에서 박원주 견고한 문명이 세워진 도시 사막의 강 곁에는 죽순같이 시멘트 나무가 대지를 뚫고 자란다. 가지도 잎도 없는 간략한 생명의 성장. 바다에 모래 씨앗을 반죽해 높다란 긴 해변을 세워다 놓는다. 간만에 하늘이 전하는 바다의 빗소리에 나무속에서 구부정한 벌레들이 웅성 되기 시작한다. 용케도 한 마리 벌레가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 저 멀리서 불어오는 미역 내음을 맡고 있다. 어디선가 내리는 싱거운 바다. 허기져 메마른 몸으로 죽 들이켜 보지만 다 자란 네모난 줄기는 옆으로만 퉁퉁 불을 뿐이다. 어느덧 나무껍질 속에서 속삭이는 바닷물의 소리 빈 공간 속 추억 사이로 침식의 파도를 철썩 울린다. 울리는 고동소리에 미역꽃을 피우고 파도 소금같이 하얀 옛 추억의 뿌리를 빗물 속에 녹여 간을 맞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