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수)필

‘신이 있는가?’란 자서전

별신성 2023. 4. 9. 15:10

“신이 있어?”
“뭐라고?ㅋㅋㅋㅋㅋㅋ”

나도 웃음이 나온다. 신이 있는가?란 엄청난 무게의 질문을 밥먹다가 하품하다가 툭 던지면 나는 뭐라고 할까? 웃긴 질문 같지만, 삶과 나에 대해 고민을 하다보면, 과거, 현재, 미래-시간에 대해 성찰을 하다보면, 무언가 가치, 영원한 것에 대해 의미를 찾다보면 우리는 신의 존재-거대한 벽을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나이 사십대를 지나는 내가 생각하는 “신이 있어?”하는 짧은 물음에 대한 나의 길었던 역사를 짧게 나마 백업을 한다. 누군가의 고민의 여정이 짧아 지길 바라면서...

1. 우주, 첫번째 물음의 힌트
- 어린 놈이 신이란 걸 알까?

신이 있을까? 진짜로?
나는 어릴 적부터 엄마를 따라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이 질문을 아주 일찍부터 던졌다. 왜냐하면 어릴 적 교회에서는 신을 이야기하지만, 현실에서는 신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작 느낄 수 있는 건 나의 아픔과 고통, 그 현실을 방관하는 신 정도?. 그런데도 시골에 살아서 일까? 밤중에 부시시 눈을 비비고 나와서 마당에서 쉬를 할때면, 머리위로 쏟아지는 별들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영화처럼 아름다웠다. 특히 오리온자리. 그 당시엔 오리온자리인지도 몰랐지만, 가오리 연처럼 생각 그 오리온에게 말을 거는 습관이 생겼다. 아마 나의 고통과 아픔을 그 아름다운 별을 만든 신에게 토로하는 습관이 생겼다고나 할까? '나도 저렇게 아름답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희망을 품고 말이다. 그래서 국민학교(당시의 초등학교;;) 때부터 별과 우주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작은 시골학교 도서관에 놓인 몇 안되는 책 중 우주가 나온 책들은 모조리 찾아 다 읽었다. 그리고 느낀 독후감은.. '신이 있을거 같아.' 였다. '이렇게 거대한 우주라면 무언가 우연이 아닌 필연을 만드는 존재? 시스템?이 있을거'란 이성적인 추측과 결론이 아주 어린 나이에 내려진 것이다. '그래. 이렇게 우주를 설계한 무언가(이후 신이라 부르겠다)에게 나의 존재를 걸어보자.'는 배팅이 일찌감치 내려진 것이다. 무모하든 무모하지 않든 어린 나이에도 인생이란 도박이란 생각을 한 것 같다. 매일 살면서 하는 숱한 결정들이 도박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렇게 신을 향한 나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음.. 신이 있다. 그렇다면...이게...'
2. 원숭이가 사는 세계-그 세계를 보는 눈(세계관)
중학교에 들어가자 나는 신선한 충격에 빠졌다. 내가 절대적으로 믿었던 과학책에서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고 가르치는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우선은.. 교회에서 인간의 존엄함을 많이 교육받아서 일까?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세뇌를 당해서 그래서일까? 나는 먼가 이질적인 두 세계관앞에서 선택을 강요 받았고 아주 골치가 아픈 도박이 시작되었다. 과학을 믿자니 원숭이가 인간이 되었다는 먼가 치욕적인 내 과거를 받아들여야하는 느낌이고,, 그렇다고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기엔 나의 신에 대한 믿음이 그렇게 견고하지 못했다. 아마 신이 있다면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둘까 하는 의심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진 능력, 조사력?으로 원숭이가 인간이 되었다는 과학(이후 진화론)과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창조론에 대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다. 물론 처음부터 창조론은 아니였다. 창조론은 결말적인 것이고 처음 시작은 지적설계론이다. 무언가 고차원적인 시스템이 우주를 설계했다는 이론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국민학교의 도서관을 넘어서 나는 창녕 읍내의 도서관에서 우주에 대해 세계관에 대해 탐구를 더 시작했다. 그때 발견한 책이 '현대 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란 책과 '진화론과 창조론 대백과??'(정확한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라는 아주 두꺼운 책이였다. 물론 이전에 우주에서 '나는 신은 존재한다'는데 배팅을 했기에 편향적인 책들을 고르긴 한거 같다. 이전에 신이 없다는 결론을 냈다면 진화론자의 책들을 선택했겠지만 나는 신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으니 좀더 신이 만든 세계에 대한 과학적인 결론을 공부한 거 같다. 그래서 그 책들을 읽고 난 독후감은.. 신이 있는데 뭔가 이상한 신이구나.. 이런 느낌?? 그렇다. 지적설계론에 따르면 우주와 인간은 아주 치밀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졌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확률론의 과학으로 부정되는 그런 시스템과 과학법칙과 존재들을 만든 무언가 즉 신이 존재한다고 결론이 난다. 창조론 대 진화론 책은 진화론도 보지 못한 이전 역사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는데 이게 처음부터 진화론을 믿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믿음 같지만,, 나처럼 신을 인정한 사람에게는 너무나 큰 믿음을 요구한다는 걸 알게되었다. 그런 부담스런 진화론의 포교활동에 나는 선듯 반기를 들었다. 신이 있다고 믿으면 그나마 한결 마음이 편하다고 해야하나? 예를 들면,, 생명이란 무언지도 모르는 과학, 원자나 쿼크가 무언지도 모르는 과학을 과학이라 부르는 것이 우스웠다. 이건 거의 종교수준인데? 또 진화론에서 존재와 우주의 아름다움이란 확률이 너무 어마어마한 큰 믿음을 요구했고, 어류(1심방 1심실)->양서류(2심방 1심실)->파충류(2심방 1.5심실) -포유류(2심방 2심실)의 심장의 심방/심실의 다름이 돌연변이로만 설명되는 게 연속성이란 생명체와 모순처럼 느껴졌다. 또 동물원의 원숭이나, 침팬치들이 버젖이 현재를 나와 같이 살아가는 게 그냥 믿기 싫었나 보다. 그렇게 나는 진화론과 창조론에서 창조론, 지적설계론에 더 힘을 실어주게 된다.
3. 이상적인 신-현실적인 신, 그 사이의 괴리
그런데 신이 존재한다고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힘을 실어주면 줄 수록 나는 더 허망함에 빠졌다. 신이 존재하는데 현실이 이따구야? 우주처럼 아름답기라도 하지.. 왜 내 삶은 아니 인간들의 삶은 이따구야. 이게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이라고 퉁 치면 끝날 일인가? 야속하고 무심하고 정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차가운 신의 존재. 그 절대자, 그 전능자는 왜 나를 버렸는가? 왜 인간을 버렸는가? 왜 그 어마어마한 신이란 존재가 현실에서는 눈꼽만치도 느껴지지 않는가? 신이 없는건 아닐까? 하고 돌아가고 싶을 때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과학적으로 파헤쳐버린, 판도라의 상자는 다시 닫히지 않고 나에게 신은 있다고 버젖이 결론이란 낙인을 다시 보여준다. 부르르.. 신이 있는데 인간에게 이렇게 한단 말이지? 나에게 이렇게 한단 말이지? 분노가 차오를 때도 있었다. 원망을 하며 소리를 지를 때도 있었다. 신이 있다며!! 신이 있다며!! 그런데 나한테 왜 이래. 왜 이러냐구. 차갑고 전능한 신은 전혀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더 위선적이고 조율증적인 현실을 살게 했다. 신이 있으니까 희망에 찼다가도 무심한 신에 절망하는 밤낮의 양면을 살았다. 그런데 신이 있다면 정말 그렇다면 신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실낮같은 희망에 손을 내밀어 보기로 했다. 그래 신이 있으니까 전지전능한 신이니까 내가 무슨 고민하는 지 알 수도 있어. 그래 내가 신에게 다가가고자 노력이란 걸 하는 걸 신이 눈꼽만치라도 알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나는 신에게 손을 뻗어보기로 했다. 잡든 안잡든 무심한 신의 마음이겠지만 나는 신이 있으니까 알랑방구를 끼든 영업을 하든 티끌같은 내가 발악해 보는 건 뭔가 당연해 보였다. 
4. 신을 향한 발악. 신의 선택은?
나는 지적설계론, 창조론, 우주론, 물리학 등 과학에 대한 지식으로 신이란 존재를 먼저 발견했다. 도박과 배팅이 가미되었지만, 신이 있다는 결론을 너무 빨리 내렸기에 사춘기 시절 더 철학적인 고민이 많았던 거 같다. 어쩌면 이중인격자? 같은 선과 악의 세상에서 위선자로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나의 세계관을 통일하기로 결심하고 신이 존재하니까 신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신호, 아니 몸부림을 쳐보기로 했다. 우선 나의 장기이자 능력인 조사력을 활용해 보기로 했다. 신은 무엇인가? 과학속에 존재하는 그런 지적설계자인가? 아니면 경전에 나오는 전지전능한 신의 일종인가? 교회에서 말하는 사랑의 신인가? 뭐가 맞는지도 모르지만 우선 신이 있다고 하니 내가 먼저 믿는 기독교의 신이 신이란 가정 하에 신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다. 성경의 신은 역사의 신이다. 읽으면 읽을 수록 역사와 현실을 강조한다. 어찌보면 누군가의 역사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루함도 있었지만, 역사는 사실에 기반한다는 전제하에 나에게도 타산지석이 되리라는 믿음아닌 믿음을 가지고 독서란 걸 시작했다. 그런데 신이 하나님인데 이게 예수님이고 이게 성령님이란다. 어렵다. 그렇게 나는 신의 속성에 대해 읽고 공부하고 기도란 걸 했다. 긴 여정이라서 시간이 나를 진화시킨 것일까? 신은 결국 나에게 속삭였다. 그 한마디를 위해 이 긴 여정을 달려온 거구나. 어쩌면 신은 존재하니까 신을 만나는 건 당연한 결말같지만, 신은 내가 상상하고 만든 신보다 더 인간적이였다. 신이시여가 아닌.. "안녕? 잘 지냈어?" 이정도?
5. 친구였던 신, 반갑다 친구야. (이 미친 놈.version)
그렇게 신을 만나고 나서?? 나는 이후 삶이 달라졌다. 왜냐면 친구가 생겼으니까. 친구가 사람이면 좀 굴곡이 있겠지만, 신이니까 먼가 영원한 친구같은 느낌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게 되었다. 친구야 이거 어떻하면 돼? 이런 질문도 많아지고 미안해, 좋아, 사랑해. 이렇게 연인같은 사이가 되었다. 세월이 지날 수록 우정아닌 사랑으로 끊어지지 않는 결속? 이걸 믿음이라 부르는건지?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일상과 고민에 좀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되었다. 적으면서도 참 웃기는 소리같다. 미친 소리 같다. 그렇다. 신은 미치지 않고서는 믿을 수도 만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거 같다. 미쳤으니 신을 믿는 거구나. 그래도 신이 없는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 존재론적으로 확신을 하고 난 후 그 존재와의 교제가 시작되어서 옛날로는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미친 놈이 제정신이 안드는 것 같은 느낌? 그렇게 신과의 교제는 결혼도 없는 혼인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루 하루 살고 있다. 웃기게도 신이랑 같이. 나란 일개 인간이. 성스런 경전에서 용어를 차용한다면, 더럽고 추악하고 비열하고 쓰레기같은 내가, 거룩하고 전능하고 고결하고 한치의 오차도 없는 신과 동고동락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모순같고 어쩌면 이중인격자 같고, 어쩌면 말도 안되는 소리인거 같은데, 부인할 수 없는 건,, 그렇게 하고 있으니 그렇다고 하는 것이다. 홍시맛이 나서 홍시맛이 난다고 하는데 왜 홍시맛이 나냐고 물으신다면, 뭐라 해야하나? 그렇게 신과 인간-나는 현실을 살아내고 있다.
6. 신은 있다. 그러면 생기는 문제들
맞다. 신이 있다면 생기는 어려 문제점들이 수없이 많다. 이전에 내가 했던 고민들.. 신이 있는데 내 삶이 이따구야? 신이 이렇게 방관해도 되나? 현실에서 아무힘도 못쓰는 무기력한 신이라면 안 믿는게 나을 듯. 신이 있는데 저 다른 종교인들-불교, 무당, 이슬람, 힌두... 어쩔 거임? 다 지옥감? 조상들도 지옥가나요?ㅜㅜ 금방 생각나는 것만 해도 방어가 안되는데 공격력을 갖춘 수많은 지성인들의 공격은 내 선에서는 방어가 힘들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미 말했듯이 나에겐 신이 친구라서 친구를 버릴 수는 없고, 그 고민들에 대해 친구에게 물어보곤 한다. 변명처럼 들리는 말도 있고, 신의 뜻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나는 친구에게 묻는다. '너 말이야. 너 원래 이런 애 아닌거 같은데 왜 이러는 거야?'라고. 물어서 대답해줄 때도 있고 안해줄 때도 있지만 나는 친구에게 묻는 것만으로도 친구의 마음 한켠을 비집고 들어가는 거 같아 좀 마음이 놓인다. 다 이유가 있겠지 라는 믿음이, 교감이 생긴 것이다. 내가 엄마에게 던져도 나에게 일일이 설명하지 않았던 수많은 질문들- 엄마 이건 뭐야? 이건 왜이래? 이건 아닌데?- 그런 질문보다 좀더 어려운 것일 뿐이겠지 하고 언젠가 발견할 정답 또는 발견 못할 정답을 믿고 이해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친구가 없기 때문에 문제로 느껴졌던 것 같다.
7. 신과 함께, 영원을 살다
신을 믿어서 좋은 점은 친구 이상으로 많다. 친구가 해주는 좋은 말, 선물, 약속 등은 현실을 살아가는 나를 좀더 진지하게 만든다. 신이 존재하는 곳에 내가 있다면 이런 꿈도 꾸고, 그곳을 천국으로 부른다면 그곳에서 사는 삶도 생각을 해보고 하루의 일과가 어떻게 다를까? 피식 웃으며 희망이란 걸 생각해 본다. 내 친구중에는 (A)신이 있다고 믿는 친구도 있고, (B)신이 없다고 믿는 친구도 있고, (C)신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는 친구도 있다. 그중에 C타임의 친구가 교회를 다니기에 왜 너는 교회를 다니니? 물으니 신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기에 혹시나 신이 있으면 어떡하나? 죽은 후 지옥에 갈 바에는 교회가는 시간을 투자해서 천국에 가겠다 했다. 피식했다. 과연 그럴까? 천국이란 건 교회에 가서 되는 것일까? 천국은 어떻게 가는 것일까? 뭐 당연한 거겠지만, 천국은 신을 아는 사람이 가지 않을까? 천국이 신의 소유물이라는 가정하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가는 건 아닐테니 말이다. 그럼 교회 가면 다 신이 그 사람을 알까? 교회에 가는 사람들. 교회 버스 기사도 가고, 교회에서 카페 알바하는 사람도, 성가대 반주하는 사람도, 음향시설 체크하는 사람도, 청소부도, 교회를 간다. 예배당에서 예배만 드린다고 투자가 될까? 이왕 할빠에야 신을 진짜 만나는 배팅 정도는 해야되지 않을까? 우리가 믿음이라 부르는 그 사소한 투자 정도는 해야되지 않을까? 물론 그 믿음도 신의 선물이니 어찌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의 친구(신)를 친구들에게 소개한다. 좋은 것을 나누면 배가 된다는 속담처럼. 유한한 인간의 삶, 고통과 절규의 삶, 말도 안되는 살인, 강간, 사기.. 범죄의 삶, 그 속에 사는 우리네 삶이 어떻게 좋은 것인가? 해답을 제시해주는 건 신이란 친구 밖에 없어서 말이다.
결론을 내야 한다면, 신은 존재한다. 그 신에게 인생을 걸어라. 그리고 누려라. 자유로워져라. 어떤 굴레도, 속박도, 이론도, 시스템도 신 앞에서라면 무기력할 뿐이다. 그 신인, 친구와 살아보라. 믿음이니, 소망이니, 사랑이니, 그 고차원적 단어들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친구는 나의 이야기에 반응해 줄 것이다. 그게 신이니까. 친구니까. 친구 사이란 편한 사이 아닌가? 무언가를 해야하는 삶에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 것은, 신을 위해 매일 경전을 읽고 기도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해야만이, 신이 "녀석 기특하구만. 너는 구원이야."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꺼 같으면 모든 인간을 목사로 만들었겠지. 그게 아니라 친구사이로 만든 것은 같이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그게 친구니까. 매일 주인을 위해 일하거나 수고하는게 아니라 친구로 말걸어 주고 친하게 지내는 게 다인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 중 하나가, 신이라는 모든 걸 다 가진 존재 앞에서 한낮 인간이 그 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목적(구원, 해탈 같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전지전능한 신이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신은 오직 새로운 신인 신과 비슷한 대화가 통하는 친구가 필요할 뿐이다. 그래서 인간이 동물이 아닌 신처럼 만들어진 것이다. 무언가를 위해서 살아가던 인간이 누군가와 살아가는 인간이 되는 순간이 필요한 것이다. 신과 함께 영원을 바라보며 함께 걸어갈 친구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