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설 같은 고귀한 단어를 선택할까 하다가 그냥 직관적인 '똥'이 좀더 빨리 이해가 되는 거 같아 글로 각인했다.
우매한 내가 다시 이글을 볼때 아하! 하고 금방 느끼도록 배려한 것이다.
갑자기 왠 똥이냐고?
그러게.. 갑자기 왠 똥일까? 아이를 키우면서 매일 기저기를 갈면서 숱하게 되뇌인 단어.
똥!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 기저기를 갈면서, 또 매일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 나를 보면서도, 나는 똥에 대해 아무 느낌도 감흥도 없었다가 갑자기 똥이 내 머리를 채우는 건 우연일까? 필연일까?
아무렇지 않게 매일처럼 화장실에 가서 똥을 누다가, 갑자기 똥이 내 머리속을 온통 채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펜을 들어 글을 써야만 번뇌가 풀리는 단계에 이르렀으니.. 이게 왠 똥이냐.
1. 똥. 배설이란 존재의 의미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은 얼마나 고귀한 질문인가?
그런데 왜 나는 똥을 누는가? 똥은 왜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은 얼마나 더럽고 황당우매한 질문같은가?
똥에 대해 금기시하던 나에게, 똥이란 더러운? 존재에게 급습을 당하고 결국 머리 속을 채운 똥 세례를 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왜 똥을 눠야하지? 이 질문을 좀더 질문다운 고귀한 질문으로 승화하고자 한다
왜 인간은 똥을 눠야하나? 심지어 예수도 왜 똥을 눠야 하는가?
똥이란 더러운 것인가? 왜 더러운 것인가? 냄새가 나서? 그냥 더러우니까? 그냥 더러운게 있을까?
그럼 그냥 더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얼까? 냄새가 나서? 내 몸에 있던 무언가가 나와서? 이젠 필요가 없으니까?
달면 삼키고 쓰면 뺃는다던 토사구팽처럼, 단물이 쪽 빠져 버려지는 똥에게 긍휼한 마음이 쏟아지는 이유는 멀까?
똥.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 싸대던 그 존재가 왜 내곁에 매일 머물러야 하는지?
갑자기 드는 그 의문에 나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똥. 너는 왜 내 몸 속에 항상 머물고 있느냐?
똥. 너는 왜 내가 매일 엉덩이를 까고, 괄약근을 열어 힘주어 싸고, 너의 냄새를 맡으며, 하얀 휴지를 더럽히며 닦게 만드느냐?
똥. 너는 왜 나에게 매일 너를 누지 않으면 안되는 게 의무와 책임감을 주느냐?
똥. 너는 왜 내가 너를 싸고 싶다 싸야한다는 욕구의 화신으로 만들어 버리느냐?
고귀한 나라고 생각하며 고차원적 인간의 삶을 살아가던 나를.. 그냥 단세포 아베마의 똥누기 정도의 하등생물로 만들어 버리는 그 '똥'이란 존재에게 나는 너무나 화가 나면서도, 왜 내가 똥의 귀속물로 살아야 하는지 원망스러우면서도, 이를 어쩌지 못하는 나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배설의 인간에 대해, 나는 생각을 넘어 고찰을 넘어 명상을 해보기로 했다.
2. 똥. 이전에 식사가 계시니라
똥은 왜 나오는가? 먹었기 때문이다. 왜 먹는가? 왜 먹어야 하는가?
살려고. 그러게 왜 우리는 먹어야만 살 수 있는가? 꼭 먹어야만 한다면, 한번만 먹거나, 내가 먹고 싶을때 먹으면 안되는 것인가? 내가 먹고 싶어서 먹는다기 보다는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이 먹는 무기력한 인간의 실존에 너무 허탄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진짜 태어나면서 엄마 젖을 한번만 먹으면 영원히 배가 안고프거나, 이번주는 바쁘니까 저번주에 이번주꺼까지 몰아서 먹어두면 배가 안고프거나 하면 좋을텐데.. 배고픔은 여러 계획과 옵션에 능한 인간에게 너무 화들짝 다가와 "먹어!" 외치곤 욕구의 입을 벌려 쑤셔넣게 만든다. 그 짧은 하루만 해도 아침, 점심, 저녁 먹는데 3시간 이상씩을 소비하고 물, 커피, 간식, 술 등 추가적인 섭취 시간까지 고려하면 가히 먹기위해 산다고 해도 인색하지 않을만큼 우리는 먹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참 어이가 없다. 고귀한 인간이 동물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게 너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잠을 자는데 하루의 1/4을 소비하는게 어이없는 것처럼, 무얼 먹는데 인생의 1/8을 또 소비한다는 자체가 ‘인생은 참 낭비의 연속이구나!’하고 명치를 딱 때리게 된다. 그나마 ‘맛있는 걸 먹고 혀가 즐거우니 됐지 머’하고 위안을 삼아 보지만, 그래도 배고픔의 걸신이 다시 위액을 뚫고 내 머리 속을 채울 때면, ‘이놈이 또 발작을 했구나!’ 하고 버럭거리다가, 어느새 그 걸신의 추종자가 되어 냠냠 쩝쩝하는 나를 보면, 인간 욕구의 허망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이 먹고자 하는 욕구는 다름 아닌 살고자 하는 욕구와 연결되어 있기에, 죽지 않는 나에게 먹는 것은 필연의 선택지이자 종착역인 것이다.
결국 살고 싶은 인간에게는 욕구란 것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똥에서 시작된 의문들은 배설욕을 넘어, 식욕을 넘어, 생존욕으로 이여졌다. 나는 죽기 싫다. 그래 나는 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먹고 싶다. 그래서 나는 싸고 싶다. 그래서 일까? 똥이 내 속에, 내 곁에 항상 있었던 것이다.
3. 똥. 생명과 삶의 부산물인 죄악인가?
그렇다면 똥은 더러운 것인가? 이전의 인과론을 당겨보면 똥(배설욕)->음식(식욕)->삶(생존욕)으로 이어지기에 삶과, 삶을 지탱하는 욕구가 더럽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똥은 더럽게 느껴지는가? 똥은 더럽지 않은데 더럽게 느껴지는 것인가? 더러우니까 더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곰곰히 다른 인과론과 느낌이 다른 똥에 대해 좀더 의미를 살펴보고 싶다. 우리는 더러운 것-더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먹지 않는다. 결국 가치에 대해 취사 선택이 가능하다. 삶에 있어서도 우리는 좋은 것은 취할 수 있고 더러운 것은 피할 수 있다. 그런데 유달리 똥은 피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황금 똥을 누거나, 아름다운 똥을 누는 사람은 없다. ‘그럼 똥 자체가 더럽지 않은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건 아니야' 하고 급격한 부정이 오는 걸 보면 똥은 뭔가 다른 것 같다. 그냥 더럽게 느껴진다.
진짜 똥은 더러운 것인가? 똥과 비슷한 것들, 우리 몸에서 나오는 것들, 예를 들면, 오줌,방귀, 땀, 코는 더러운 것인가? 또 엄마의 뱃속에서 나온 나도 더러운 것인가? 똥만이 냄새가 나니 더러운 것인가? 냄새가 역하다고 더럽다면, 냄새가 역한 다른 것들, 예를 들면, 두리안, 홍어, 젖깔, 매주 등은 더러운 것인가? 어쩌면 똥도 더럽지 않을 수 있다. 밭에 뿌려진 똥거름처럼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있는 ‘하나의 번데기’처럼 그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내 몸에서 나온 땀이 냄새가 난다고 땀구멍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똥이 냄새가 난다고 똥꼬를 막아버리거나, 내 몸에서 다 빼버리거나, 다시 소화를 시키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즉, 똥이 냄새가 날찌언정 더럽다고 단정짓을 순 없다. 음식도, 삶도, 나도 냄새가 나고 역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삶에서 그것을 더럽다고 단정짓고 버리는 것만큼 큰 어리석은 정죄는 없을 것이다. 똥. 그는 그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다. 토사구팽하지 말자.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리더라고 다시 새 쓰레기를 맞을 준비하는 것처럼, ‘똥을 누어라 한번도 똥을 누지 않은 것처럼’ 새 똥을 맞을 준비를 해야하는 것이다. 쓰레기는 더러운게 아니다. 쓰레기는 조금 전에 나와 함께 있던 의미의 존재들, 집합체이다. 내게 필요없다고 해서 모두 더럽다고 한다면, 내게 필요없는 걸 어디 담아 두었기에 더럽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이기적인 내 중심적 생각인가? 나 이외의 모든 것, 내 필요와 유익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것은 더럽고, 악하다고 심판해 버리면, 나는 사이비와 무엇이 다른가? 쓰레기도 쓰레기 봉투라는 정의(definition)의 감옥에 가두지 않으면, 재활용이 가능한 의미있는 존재들이다. 음식물 쓰레기도 사료로 탈바꿈하는 세상에서, 내 코가 신이 되어 냄새로 선악을 판가름하지 말자. 또 내 필요에 따라 이기적으로 선악을 판가름하지 말자. 냄새가 나든, 내게 필요가 없든, 모든 존재는 존재하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4. 똥. 나는 똥일까? 영원한 똥이 되자.
사실 똥이란 존재가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온 이유는 인생에서 똥이 가진 의미가 무얼까를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똥은 존재하고 존재해야만 했다. 또 나는 냄새나는 똥을 만들어야했고, 매일 싸야만 했다. 그런 단순한 의미들이 나를 고민하게 했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은 꼬리를 물었다.
왜 나는 배고픈 존재로 만들어졌는가?
왜 나는 허기지고 공허하며 무언가를 애타게 찾고 찾아서 채워야하는가? 왜 매일 그 욕망과 치열하게 처절하게 싸워야만 하는가? 내속의 결핍과 내속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 욕망 사이의 괴리. 그게 유한한 인간의 숙명인가? 예덴동산에서 먹었던 선악과, 그 원죄의 똥인가? 아니면 그때 먹지 못했던 생명나무를 먹어야만 하는 미션의 똥인가? 그래서 예수님도 마지막 만찬에서 자신의 몸과 피를 먹으라고 그래야만 산다고 하셔야만 했나?
결국 똥에서 시작된 의미의 나열은 결론은 나를 또 허무맹랑한 영원을 향한 갈망으로 끌고 간다.
나는 똥이 아닐까? 뭐 생뚱맞은 소리냐고? 생각해 보자. 똥이 어떤 결과물이라면.. 어떤 무의 세계에서 빅뱅처럼 태어난 우주도 무의 똥이 아닐까? 또 우주에서 태어난 별들은 별똥이 아닐까? 나는 조상의 똥이 아닐까? 나는 신의 똥이 아닐까? 어떤 의미나 존재들에서 태어나 특정한 의미들을 다하고 난 모든 부산물들. 그 가운데 내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내 몸에서도 별의 냄새가 나는지? 신의 냄새가 나는지 킁킁거려 본다. 나도 어떤 결과물(output)이기도 하고 또 어떤 똥을 위한 투입물(input)이기도 하다. 똥들의 세계. 그것이 이 우주고 또 존재들의 세계다. 우주에서는 숱한 별들이 생성이 되고 또 폭발해 똥이 되고 또 그 똥 잔해들이 모여 또 별이 된다. 또 우주도 인간도 세계도 어떤 법칙과 시스템의 산물이고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원인과 결과와 시간의 부산물인 똥들이 세계에 가득하다. 물론 냄새가 날때도 있고 시궁창 같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밭에 뿌려진 똥처럼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어느새 돌아보면 거름이 되어 나무에 깃들어 있는 것처럼 모든 존재와 인과들은 의미있는 똥이 될 것이다.
나도 똥이다. 내가 무엇을 꿈꾼다면 꿈도 똥이 아닐까? 내가 생각한 그 꿈도 이전 무언가의 똥이였고, 이후엔 또 무언가의 똥이 될 것이다. 나의 수많은 똥들이 영원히 의미의 명륜 속에서 수많은 의미들을 잘 먹고 또 잘 싸길 바란다. 김춘수의 꽃처럼 아름답지 않은 나의 똥들이지만 존재하는 한 그 똥은 또 영원히 소화의 길을 걸을 것이다.
언젠가 똥을 쌀 필요가 없는 천국에 이르면 내 똥이 그립겠지? 그전까지는 현생에서 내 곁의 수많은 똥들과 함께 많은 것을 느끼고 사랑하고 꿈꾸며 함께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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