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수)필

변태들이 사는 정상적인 세상

별신성 2023. 4. 15. 16:44
변태 (變態)
1 본래의 형태가 변하여 달라짐. 또는 그런 상태.
2 정상이 아닌 상태로 달라짐. 또는 그 상태.
3 성체와는 형태, 생리, 생태가 전혀 다른 유생의 시기를 거치는 동물이 유생에서 성체로 변함. 또는 그런 과정.

가끔 세상을 살다보면 이상한 나를 발견한다. 말이든 행동이든 감정이든 관계든.. 뭔가 내가 배운 상식, 정상적인 패턴과는 거리가 먼 나의 모습에 사뭇 놀라곤 한다. '이래선 안되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내가 생각하는-교육받은- 상식과 정상을 향해 되돌아갔다. 그런데 그런 반복이 이어지고 나는 결국 실존과 이상적인 나의 모습 사이의 괴리를 발견한다. 괴리. 물론 당연한 것이지만, 과연 나는 평범해야 하는가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런데 무엇이 정상이란 말인가? 무엇이 평범이고 상식이란 말인가? 기준도 법규도 없는 평범이란 잦대에 나는 따라야 하는가? 나는 남들과 같은 방식에 복종해야 하는가? 여기서 잠깐,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 유익한 것인가? 그것이 나를 즐겁고 기쁘게 하는가? 안타깝게도 결론은 No였다.


1. 나는 변태이다
나는 이말이 하고 싶었다. 왜 일까? “정상입니다.” 이런 말만 듣기 좋아하던 내가 변태라는 말을 뺃는 용기가 생겼다. 이것은 여러 현상, 특히 나의 삶을 살아가며 발견한 또 하나의 법칙같은 것이였다. “나는 특별하단다.” 이말은 내가 좋아하던 말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런 고상한 말을 내뱉으려면 한가지 전제가 있어야 했다.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전제. "그래. 나는 남들과 달라. 하지만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처음엔 잘못 생각하고 사용한 것 같다. 그 착각 때문에 나는 남들보다 우월하거나 잘 나야한다는 그런  비교학적인 우위를 위해 노력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내가 남들과는 다르다는 의미는 오로지 너와 나의 존재론적 상이함 그 사실일 뿐이였고 그것이 나의 특별함의 근거였는데 큰 착각이자 오판을 했다. 너와 나의 다름에는 정상과 비정상, 평범과 이상, 상식과 비상식이란 기준이 없었다. 그냥 나는 나의 존재로 특별할 뿐이다. 그것이 상식이든 비상식이든 나는 나로, 너는 너로, 존재할 권리가 충분한 것이다. 그 착각을 벗어나 남들과 다른 나를 사실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나는 남들과 다른 나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남들과 어떻게 다른가? 또 그 다름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또 다른 나의 삶은 어떻게 다르게 살아내야 하는가? 


2. 나는 변태중이다.

처음 나를 만드는 것은 유전적인 몸이다. 키, 얼굴모양, 체형, 피부톤, 머리결 등등 나란 존재는 처음엔 여기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아직 미숙한 어린 나에게 '나를 가두는' 판단과 비교란 감옥이 도사리고 있었다. 예를 들면, 키가 작다거나, 얼굴이 못생겼다거나, 체형이 외소하다거나, 피부톤이 어둡다거나, 머리결이 곱슬이라거나. 이런 비교와 판단은 해맑고 멀쩡하던 나를 움추리고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열등감이란게 생겨버린 것이다. 하지만 내가 부모를 고를 수 없듯이, 나는 주어진 몸 또한 바꿀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열등감이란 상처를 온전히 받아내며 어린 유년기를 보냈다. 안타깝게도 여기서 내 첫번째 상처가 생긴 것이다. 이 몸에 대한 상처와 열등감은 어떻게든 나를 왜곡시키고 변화시켰을 것이다. 어쩌면 남들과 동일한 멀쩡한 사람은 아니였을 수도 있다. 발버둥치고 도망가다 낙심하며 어떤 동경이나 망상을 하는 습관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무일도 아니라며 현실을 부정하거나 망각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어릴 적 과거를 모두 기억하지 못하듯이, 나도 나의 어릴적 일상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의 상처와 열등감과 동경과 망상이 나를 남들과 다르게 만들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몸에 대해서도 남들과 다른 해석, 기호가 생긴 것도 확실하다. 그러면 이런 삶의 패턴들이 유전적 몸으로만 끝이 났을까? 아니다. 내 부모의 재력, 언행, 태도, 관계.. 그 모든 것들 또한 나를 남들과는 다른 존재로 바꾼 것도 명확하다. 더 나아가 가정 뿐만 아니라 동네친구들, 학교지인들, 애인, 회사동료, 군대 등등 숱한 존재들과 접촉하며 나만의 세계를 만들고 나를 변화시키며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것이다. 현재의 나. 남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지금의 나. 그런 나를 나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남들처럼 같은 기준과 생각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 천만에 말씀. 누구나가 사는 그런 평범한 그 확률론에 나를 끼워맞추며 살진 않고 있다. 그 확률론은 모든 인간이 자유롭다는 전재가 아니라, 동일한 로봇을 양산한다는 결말로 끝나기 때문이다. 처음에 던진 멋진 말-나는 특별하단다-과는 너무 상반되는 것이다. 결국 나는 다르다는 결론 앞에 다시 선다. 그렇다면 나는 남들과 뭐가 다른 것인가? 그러게 나는 남들과 뭐가 다르지? 결국 이것을 나는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접근하자. 평범과 동일을 교육받은 남-타인에게는 절대 나를 누설할 필요도, 설득시킬 필요도, 이해시킬 필요도 의미없으니까. 나는 나이다. 너와 다른 나. 생각도 취미도 기호도 모두 다른 나. 오늘도 나는 너와는 너무도 다른 나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3. 나를 받아들이다
"당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이 말을 우리는 남에게 너무 쉽게 건넨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당신이 알고 바라는 상식/평범/정상/아상적인 당신이 아니여도 받아들이세요." 이말을 나에게 해보자. 안타깝게도 정작 나는 내 상식과 평범과 정상의 기준을 조금만 벗어나도 분노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결국 좌절하고 만다. 왜 나는 키가 작지? 왜 나는 어른을 만나는게 좋지 않지? 왜 나는 고기가 싫지? 왜 나는 이렇지? 왜 나는 이래야만 하는거지? 뭔가 웃기는 독백이나 말 같다. 하지만 매순간 우리는 누군가 정해준 상식과 교육의 잣대에 내 기준을 끼워맞추는 우를 먼저 범한다. 시도해보면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을 뿐아니라 내게 필요하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되지만, 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쏟아붓는다. 교육이나 상식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어릴 적 받은 교육들은 세상을 안전하게 또는 무난하게 살아가게 하게끔 한다. '이정도만 알아도 너의 판단에는 문제가 없을꺼야.' '다치지는 않을꺼야.' '남들처럼은 살아갈꺼야.' 이건 하나뿐인 인생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힌트인 건 확실하다. 군대에 비유하자면, 어떻게든 총을 쏴야하니 어떻게 쏘는지 사격 자세를 알려주는 기초 작업과 같은 것이다. 생명을 담보하는 군인에게는 중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인이 되었고, 군대도 나왔다. 이제는 교육과 교과서에만 머무를 수 없다. 어릴 때의 교육이 총을 쏘는데 초첨을 맞춘다면, 어른이된 이제는 총을 잘 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제는 총을 쏠 줄 안다면 다음 작업으로 영점 초점 작업이 필요하다. 즉, 나를 알고 받아들이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영점 초점 작업이 뭐냐면, 총을 쏘면 총알이 한 방향으로 모이게 되는데, 이것을 클린크를 조절해서 나의 체형에 조준점을 맞추는 과정이다. 이제는 나의 몸과 나의 특성에 맞게 영점을 맞춰야한다. 처음 전달받은 조준점(교육 방침)과 총(교과서)에만 계속 머물러선 나아갈 수 없다. 이제는 나를 받아들이고 나에게 현실을 맞추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잘못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나를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나가야 한다. 나도 그 연습 중이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내가 낮설다. 내가 아는 과거의 나는 모범적인 나였으니까. 이상하고 비상식적인 나를 받아들이는 작업은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아서 결코 쉽지 않다. 몸이나 부모의 상처같은 과거의 특성들이이 나를 바꾼 것을 모두 파해치기도 버겁다. 남들과 다른 나의 모습이 괴물이나 외계인 같아서 받아들이는 작업은 멀고도 험난한 길이다. 나는 나의 모든 상처와 상처에서 비롯된 나의 다름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을까? 욕망과 절망과 아픔과 태도를 직시할 수 있을까? 거울에 비친 내가, 이상적이지도, 평범하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아도, 나를 나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4. 나의 세계를 만들다
영화 덱스트를 보면, 어릴적 살인마에게 부모가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한 주인공은 훗날 피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살인을 저질러야만 살아갈 수 있는 모습을 본다. 향수라는 영화에서는, 남들과 다른 향기에 민간한 주인공을 모습을 본다. 주변에서도 고소공포증이나 환공포증을 가진 친구들을 보면, 아직도 나는 그들이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왜 그렇지? 원인이야 어떻든 그들은 현재 나와 다른 것이다. 그냥 다른 것이다. 우리 모두는 모두가 다르다는 도착점, 즉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이제는 남들과 다른 삶을 달려갈 나만의 비밀 전략이 필요하다. 누군가에게 이해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은 오로지 나의 세계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평범한 사람들에게, 나의 모든 사정과 역사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자체가 엄청난 시간낭비다. 그럴 시간낭비 대신, 나는 또 다른 나의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를 살아가야 한다. 좀더 상투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나만의 영화를 만들고 그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는 남들과 무엇이 다른가? 예를 들면, 체질 때문에 무엇을 피해야하거나 무엇을 꼭 먹어야 하는가? 무슨 사고가 있어서 무엇을 특히 싫어하는가? 무슨 열등감이 있어서 무엇을 동경하거나 좋아하는가? 무슨 상처가 있어서 무엇에 애착증이 있는가?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나는 남들과 이것이 다르구나.' 그 명확한 사실들을 낮낮이 찾아내서 살펴봐야 한다. 거기에다 나의 다음 모습을 덧입혀가며, 어떤 옷을 입힐지, 어디를 여행할지, 무슨 일을 할지, 노년은 어떻게 살아낼지, 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학생 때 받았던 그 교육처럼, 나를 안전하고 평범하고 상식적으로 살아내게 할 나의 세계를 내가 교육하는 것이다. 나의 세계에서는, 내가 곧 평범하고 상식적이고 교육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나는, 나라는 신대륙을 발견하고 경험하고 누비고 즐기며, 나란 문명을 이룩하는 것이다. 남들과 다른 미지의 나의 세계. 내가 주인공인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