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수)필

절제와 쾌락이 공존하는 삶-2018.01.18.일

별신성 2018. 1. 29. 08:42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많은 사람들이 고민과 답을 내리는데 그걸 철학이라 부른다.
철학중에 가장 으뜸으로 뽑는 건 유럽철학의 근간인 고대 그리스 철학이다. 이 그리스 철학에 두 학파가 있었으니 금욕주의(스토아)와 쾌락주의(에피쿠르스) 학파이다. 문제는 이 두개가 병존하는 것이다! 이 두 학파 모두 훌륭하지만 둘의 오류는 상대학파를 배제한 것이다. 즉 자신이 옳다고 한 방향으로 삶을 너무 단순화 시킨 것이다.
결론은 삶에는 금욕과 쾌락이 공존하는 현실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즉 삶에는 절제도 필요하고 쾌락도 필요하다. 어떤 결정(조언)을 내릴 때 이 두가지를 꼭 기억하자.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삶속에 한방향만 진리인양 선택하려 한다. 예를 들면 종교인이나 노인은 금욕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문화계나 청년들은 쾌락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각각 어떤 문제를 만날때 그들의 테두리 안에서 결정(조언)을 내린다. 즉, 사람과 상황 이해없이 금욕 또는 쾌락이란 처방을 내린다
과연 그 사람과 그 상황의 이해없이 삶을 제단한 후 나의 노선대로 "참으십시오!" 또는 "즐기세요!"를 결정을 내리는게 옳은 건 아니다. 근데 모두다 그렇게 쉽게 결정을 내린다. 그래서 종교인의 처방이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이 되거나, 청년들의 결정이 중독과 소비주의로 이어지는 오류를 범한다
사람의 두가지 속성.. 물론 신의 속성이기도 하다. a.사랑(쾌락,자유, 기쁨..)과 b.정의(금욕,평등,고통..)로 짧게 바꿔쓸수 있다! 이두가지는 항상 우리 삶에 함께 하기에 내가 지금 즐거움을 따를 것인지, 금욕하며 참을 것인지 지혜가 필요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삶이기에 딱히 정답은 없다.
간단한 예로 누구나 하는 먹고 싸는 것이있다. 고상한 말로 식욕, 배설욕 등으로 표현되지만 이걸 하지 않는 산 사람은 없다. 그래서 모든 철학자가 적당히란 의미로 타협을 한다. 적당히 드세요. 적당히 싸세요. 스토아 학파도 "계속 굶으세요", 에피쿠르스학파도 "계속 드세요"라 말하지 않는다. 지금은 드세요! 이젠 그만 드세요! 이렇게 두 학파 모두 상황을 보며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 그 사람과 그 상황을 보며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 성욕을 보자. 산 사람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지만 생존과는 직결되지 않기에 두 학파가 오류를 범하고 만다. 금욕과 쾌락. 과연 금욕과 쾌락이 정답이겠는가? 식욕처럼 적당히란 말로 둘러라도 대면 그래도 오류는 안 범할텐데.. 현세의 스토아학파는 무조건 금욕을 외치고 현세의 에피쿠르스들은 무조건 쾌락을 외친다. 결론은 그 사람과 상황없는 처방은 식욕으로 따지면 기아가 되거나 폭식이 되거나 둘중하나가 될것이다. 그래서 종교인들이 너무 청년들의 즐거움과 현실을 외면한다고 욕먹고, 청년들은 퇴폐적인 향락과 무절제의 중독에서 허우적되는 철학없는 삶과 비슷한 결과를 본다. 아무리 머리가 아파도 그 사람과 상황에 들어가 고민하고 이해한다면 지금 필요한게 사랑인지 절제인지 공감할 것이다.
똥 누는게 잘못이 아닌데,, 왜 계속 똥 싸냐! 이렇게 백날 잔소리 해봐야 서로의 장벽만 칠뿐이다. 그리고 계속 똥싸자!! 화장실도 필요없어! 아무때나 싸버려! 이렇게 똥꼬 관리를 못한다면 그 사람도 똥통에서 허덕일뿐 아니라 그 주변도 피해를 볼 것이다. 똥은 먹은 것과 배탈 등을 보고 누겠지;
그렇게 본질적인 사람과 상황을 배제한 채.. 자신의 철학이 언제나 옳은 것처럼 또는 자신의 경험이 옳은 것처럼 강요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지금 문제(똥?)이 급한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나 폐착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하면 좋겠다. 내 소중한 사람들은 내 철학보다 그들의 상황이 중요하단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