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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피나무 한나무

제피나무 한나무 -박원주- 숲속에 핀 제피나무 추억 한나무. 내 어릴적 추억같아 스다듬는다. 손가에 스며드는 진한 제피향. 어디선가 추어탕끓는 냄새가 난다. 주륵주륵 비가 내려 시냇물이 불어나면 동네아이들은 신이나서 족대를 들고 동네어귀 냇가들을 샅샅이 누볐었다. 쪽대질에 냇가풀숲은 흙탕물이 되고 놀란 미꾸라지들은 복조리마냥 쪽대속에 한켠에 담겨 허우적댄다. 미꾸리가 거품을 물고 애원을 하면 할수록 우리배는 더욱 더 허기가 져왔다. 빗방울이 아직 맺힌 토란잎도 따고 마당 한켠 감나무밑 제피도 땄다. 까아만 제피씨를 발라내고 나면 손톱은 쏴한 제피향에 쩔어버린다. 부엌 군불 아궁이엔 추어탕이 끓고 집안엔 오랜만에 구수한 고기향이 가득하다. 밥 한공기 쓱싹 말아서 뚝딱 먹고나면 곤한 몸은 청마루에 어느새 골..

농담(이문재)-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해서 종은 더 아파야 한다

농담 -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해서 종은 더 아파야 한다

만일(if)-나의 인생의 지표(Motto)같은 詩

만일 -루디야드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 만일 뭇사람이 이성을 잃고 너를 탓할 때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면, 만일 모두가 너를 의심할 때 자신을 믿고 그들의 의심을 감싸안을 수 있다면, 만일 기다리면서 기다림에 지치지 않는다면, 속임을 당하고도 속이지 않는다면, 미움을 받고도 미워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너무 선량한 체, 너무 현명한 체하지 않는다면. 만일 꿈을 꾸면서도 꿈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 또한 네가 어떤 생각을 갖더라도 그 생각이 유일한 목표가 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리고 만일 인생의 길에서 성공과 실패를 만나더라도 그 두 가지를 똑같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네가 말한 진실이 왜곡되어 바보들이 너를 욕하더라도 너 자신은 그것을 참고 들을 수 있다면,..

즐거운 편지 (황동규)

즐거운 편지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 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의자(이정록詩)-사는게별거냐 ..의자몇개 내놓는거여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스위치를 끄다

스위치를 끄다 -박원주- 흥겹게만 치던 지루한 키보드소리에 여기가 어딘가? 스르르 두눈이 감긴다. "너는 가슴한번 열지않고 사랑을 썼더냐? 한숨소리 한점없이 추억을 지우고 그토록 해맑게 웃어댔더냐?" 너는 디지털, 나는 아날로그. 만날듯 비켜가는 온-오프 스위치. 나는 오늘도 힘겹게 하루를 그리고 나를 쓰는데 너는 그리도 쉽게 하루를 그리고 나를 지우는구나. 각본같이 잘짜여진 네 인생 시나리오보다, (그게 프로그램인지 벽돌인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그 계획들이 즐거운 퍼즐일지도) 내 울음 뒤에 눈물을 닦으며 다시 쓰는 머쓱한 인생을 더 사랑해주며 꼭 안아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