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수)필

사건과 확률속에 나의 선택

별신성 2017. 12. 17. 22:09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한때 그책을 보면서 유한한 세상과 시간속의 나에게 안주하는 것만큼 바보같은 짓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유한한 세상속에 유한한 나의 시간과 열정과 체력을 보면서 나는 어느새 안주를 안주로 삼아 거득히 취해 있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두가지 확률이 있다. 내가 많은 일을 저지르지 않고 두가지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하나(A)는 새로운 치즈를 찾아 여기를 떠나는 일. 하나(B)는 지금 여기에 남은  치즈로 좀더 시간을 버는 일.

나에게  A와 B 둘중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가장 행복한 고민은 A와 B가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다. 두가지 미래에게 프로포즈를 받는 기쁨은 짜릿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둘다를 선택할 수는 없기에 결국엔 하나만 선택해야한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일은 유한한 세상에서 가치를 선택할 때 나의 선택은 일어난 일에 대한 대응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자 A와 B가 일어나는 경우(A∪B)와 A가 일어나는 경우와 B가 일어나는 경우와 A와 B가 둘다 일어나지 않는 경우(∮)는 나에게 선택의 상황에 따라 주는 기대효용을 백분율로 계산했을 때 100%, 60%, 40%, 0%를 제공해준다.

100%의 선택권에서 나는 60%를 선택할까? 40%를 선택할까? 60%를 선택하기를 바라지만 60%라는 것은 내가 보지 못하는 미래의 영역이기에 나는 무지하게 40%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같다. 그래도 둘 중에 하나를 고민하는 일은 나에게 운명보다는 자유를 더 선사하기에 나의 삶의 범위는 더 넓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60과 40이 나에게 일어난다면 나는 순순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 상황은 다시 나를 원점으로 포멧을 하고 다시 새로움이란 정의로 나를 다시 살게 할 것이다. 매일 매일의 순환처럼 또 다른 사건의 순환은 나의 끝을 처음으로 되돌려 놓을 것이고 나는 아무렇지 않게 또 익숙하게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일상이 부디 이전 삶과는 다른 가치를 발견하고 차별화하는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 시작이 이전의 끝과 이어진 것을 발견한다면 나는 윤회의 고리에서 나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것이다. 내가 타인과 다른 것처럼 흐르는 시간속에 나는 어제의 나보다는 좀더 나은 나를 찾아가야 할 것이기에..

그러나 불행하게도 0이 일어난다면, 즉, 아무일도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의 노력과 이벤트에도 아무런 결과물이 발생하지 않는 상황은 나를 암담하게 할 것이다. 결과는 0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마이너스(-)의 손실이 발생한 것이다. 투자한 금액이 0으로 돌아왔는데 기뻐하는 사람이 없듯이 그 결과는 치즈가 사라져 가는 것을 알아버린 나아게 여기에 끝까지 남아있으라는 무기형선고와 같은 것이다.

지금은 사건의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어떤 결과에도 그 의미를 생각하는 담담함을 가지면 좋겠지만 나의 선택권이 좁아지는 결과에 나는 또 어떤 현명한 대응을 해야할지 사건들의 확률속에 나란 체스의 선택을 신중히 또 놓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