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수)필

허물과 저주에 대한 회상

별신성 2016. 2. 10. 23:21

어제의 일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까?
사실 조금전의 일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만 보아도 어제의 일이나 과거의 일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다만 내가 부인하거나 간과할 뿐이겠지. 우리가 일이라고 하는 모든 일은 물리적인 일뿐만 아니라 관계적인 모든 사건을 통클어 일겉는 말이다. 그러면 과거는 얼마나 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칠까?
조금전에 일어난 작은 사고는 나의 지금을 잡칠수도 나의 오늘을 망칠수도 있다. 그것이 작은 사고가 아니라 큰 사고라면 그 충격은 나의 인생으로까지 확대될 지 모른다. 여기서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면 무엇이 나를 결정하는가?
항간의 금수저론-부모의 유산에 따라 자식이 금,은,흙수저를 사용한다는-을 보더라도 부모의 재산은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아마 돈이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해야할지도 모른다. 부모의 재력 뿐아니라 학력, 성품, 건강 등 무수히 많은 영향을 우리는 부모로부터 유전받는다. 문제는 이 결정에는 내가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하지 않는 결정에 내가 결정되는 현실. 나는 이 문제점의 근원을 알고 싶었다. 어제.. 그제.. 그저께.. 아주 옛날 옛적에.. 나와 나의 주변-나에게 영향을 미치는-에는 어떤 파장이 일어났기에 나에게 이런 고민을 안겨다 주는 것일까?
먼저 선언하지만 나는 내 일은 내가 결정하고픈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자라면 자랄수록 나의 일에 나 이외의 요소가 관여함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결정한 어제란 과거가 현재란 지금에 영향을 미친다는 단순한 사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다. 나는 방금전 밥을 먹었고 폭식을 하는 바람에 오후에 운동하고자 했던 일정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직도 배가 더부륵하다. 그 폭식은 나의 과오였고 나의허물이였다. 그러나 그 과거의 허물이 멀쩡한 현재의 나를 가두어버리는 아주 이상한 결론이 도출되고 말았다. 물론 밥을 적당히 먹었다면 나는 가뿐한 마음의 포만감으로 즐겁게 운동도 하고 글도 썼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 글제목이 달린 것을 보듯이 나는 불만족스런 상태에 놓여있다. 쉽게 잊혀지고 삶으로 흡수되는 긍적적인 사건과 달리, 나에게 밀려온 부정적인 생각들은 물에 뜬 기름마냥 흡수되지도 않고 둥둥 뇌리를 떠다니며 나의 패턴을 헝클어 놓고 있기에 나는 무언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부정적 허물들의 영향을 최소화 할순 없을까? 나의 부정적 과거에 나를 옭아메지 않을 수 없을까?
실수와 허물, 아픔, 이런 것들은 더욱 잘 잊혀지지 않았고 특히 원인을 알수 없는 사고들은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 원인 불명의 사고들은 모두가 그 원인을 나의 잘못으로 단정짓기에 나를 더 집착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나를 객관화하기 위해 한 아이를 들겠다.
아이는 자동차가 갖고 싶었다. 물론 아이의 부모는 사고위험과 비싼 가격때문에 자동차 구매를 반대했을 것이다. 당연 아이는 때를 쓰고 울고불고 하며 자신의 욕구를 피력했을 것이다. 당연히 부모는 아이를 달래도 보고 설득도 시켜보았을 것이나 결국 안되는 억지에는 매를 들고 때리고 윽박도 질렀을 수 있다. 이렇듯 남녀노소를 떠나 인간의 모든 욕구는 다 채워질 수가 없고 그 욕구의 빈공간은 어쩔수 없이 아픔으로 채워지게 마련이다. 나는 그것을 저주라고 부른다. 아이도 원차 않았고 부모도 원치 않았던 결과, 그것이 저주인 것이다. 그런 저주는 아이 뿐 아니라 청소년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가 가출이나 비행을 저지른 기사는 틈틈히 볼 수 있다. 충분한 설득과 사랑과 용납을 하기에도 부모조차 또한 사회조차 동일한 저주의 희생양이였기 때문에 그런 저주들은 풀리지 않고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유한한 자원, 사랑, 즐거움, 평화, 인내의 현실속에서 무한한 자원과 사랑, 즐거움, 평화, 인내를 갈구하는 인간에게 걸린 저주. 그 저주는 연약한 인간에게 또다른 허물을 야기 시켰다.
누가 그 허물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엎질러져 버린 저주의 늪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유한한 육체에 무한한 욕망을 담은 존재-는 절대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그 저주는 또다른 허물을 부르고 그 허물은 다시 저주를 남기는 물고 물리는 역사가 반복되었다. 수정처럼 맑았던 아기의 영혼은 그렇게 저주의 잉크에 물들며 자라나고 있었다. 그런 결과론적 성인이 나요, 너인 것이다. 왜 아버지의 연약함을 내가 상속받아야하는가? 재산, 외모, 질병, 혈연, 습관..등 나는 새로운 인간으로서 독립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이 저주를 끊어 버릴 수 있을까? 쉽사리 끊어졌다면 애시당초 저주라 부르지 않았으리라.
이런 고민이 생긴 호모사피엔스에게 내가 해주고픈 말은 허물과 저주를 구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란 자존감이 내리는 결정에 힘을 실어주자. 조금이나마 나란 존재의 결정력과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은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내 결정의 범위를 구분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조금전 폭식을 한 것은 나의 허물일 가망성이 90%이상이다. 부모님이 식욕의 유전자를 주긴 했지만 그 영향력은 10%정도라 하자. 그러면 나의 책임소지를 정확히 부여함으로써 반복적인 잘못은 최대한 막고 나의 자책은 줄일 수 있다. 그리고 또다른 예를 들면, 소개팅에서 나의 작은 키와 사각턱에 지적을 받고 소개팅분과 헤어졌다고 하자. 나의 허물은 30%로 낮아질 수 있다. 못생긴 외모와 키가 내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너무 상처받지 말고 나의 결정없이 주어진 70%의 저주에 대해 먼저 겸허히 수용하자. 그래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반복하자 내 잘못이 아니다! 그렇다고 소개팅분의 높은 눈도 잘못이 아니다. 그건 부모나 사회 시스템의 문제 즉 저주였던 것이다. 저주는 겸허히 받아들이자. 축복만이 받아들이는 문화때문에 저주는 용납하지 않다보니 내적 갈등과 괴리가 나의 몫이 되어버려 안타깝다. 저주는 내가 걸린 것이지.. 내가 건 것이 아니다. 이제 저주를 용납했는가? 그 다음 저주에 걸린 나를 바라보자.
이제는 저주를 풀 마법이 필요하다. 그것은 저주를 완전히 풀고 나를 해방시키거나, 또는 저주를 대체할 다른 스킬의 마법을 가지거나 둘중 하나인데..풀리지 않는 저주라면 대체할 마법을 찾는 편이 더 빠를 것이다. 예를 들면 작은 키에는 좋은 매너나 성품, 정 안되면 재력이라든가, 대체 마법을 써서 이겨내는 것이다. 저주에 걸렸다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자고만 있어서는 현실은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나의 저주는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해보라..
단도직입적으로 못생긴 얼굴인가? 외소한 몸인가? 흥부같은 거지인가? 지랄 맛은 성격인가? 방정맞은 입인가?
나의 저주가 만일 풀리는 것이라면 저주라 말하지 않고 나의 허물이라 했을 것이다. 내가 결정하지 않고 결정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부정의 산물인 저주..
누구나가 걸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푸는 방법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힌트를 주자면 저주는 풀기는 어렵지만 우리 모두는 마법사가 될 수 있다. 저주를 풀려고 남은 정력을 모두 낭비하지 말고, 다른 멋진 마법을 개발해 보자. 인생은 너무 짧고 당신은 너무 멋진 마법사기 때문이다. 당신이 아픔에 많이 울었던 것을 안다. 왜 이 상처가 나에게 온 걸까.. 덧나고 덧나고 쓰라리고 아파 흐느껴 고통했던 것도 안다. 그 상처와 고통은 어쩌면 내가 감당할 십자가의 무게인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엔 나에게 다른 정체성을 코디 해주는 멋진 옷이 될 것이다. 아무도 입지 않았기에 나만 소화할 수 있는 멋진 옷이 될 것이다.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울 듯 저주의 생채기가 나를 또 울릴지 모른다. 그때마다 기억하자. 너의 잘못이 아니다!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이 저주에 갖혀 있지 않을 것이고 더 멋진 마법사로 세상에 우뚝 설 것이다. 아마 그때 비로소 저주는 걸렸든 안걸렸든 그 사실은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상중에 시나브로 저주는 아마 풀려질지도 모른다. 그런 당신의 멋진 여정을 응원하며.. 2016.02.10.밤 신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