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사상과의조율

문제를 건너가다

별신성 2015. 2. 15. 22:06

한국의 문제를 보면 몇가지가 눈에 띄는게 있다.

1.자본의 거대화: 격차와 부폐
자본주의가 경제발전과 함께 이루어지면서 자본이 거대화, 집중화되면서 노동, 부동산, 가치 등 모든 영역을 빨아들이고 있다. 우리들의 삶에서 빈부의 격차는 당연시 되고 돈이 없는 결과론적 무능한 사람은 비난을 받고 있다. 또한 자본을 통한 불노소득들은 제태크란 이름으로 불공정한 투자와 꼼수들이 합리화되고 포장되고 있다. 그렇게 축적된 자본이란 기득권은 다시 부정한 방법으로 세습되어며 그런 공정하지 못한 시스템을 고정시키고 거대한 부폐의 고리를 낳고 있다. 또한 교육과 물질을 통한 부의 세습은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이의 빈부격차를 야기할 뿐어니라 빈부를 뛰어넘어 상반되고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라이프스타일의 갈등을 야기한다. 이런 삶의 방식의 벽들은 이해와 용납의 수준을 넘어설 때 혁명으로 갈등이 표출되며 그를 통해 굳어졌던소통의 차단이 깨어지곤 했었다.
특권화된 부는 고착화 될수록 부폐하게 됨을 로마의 흥망성쇠에서 볼수있다. 경제적 부의 잉여는 사람들이 쾌락주의로 이끌게 된다. 이런 쾌락주의는 좀더 거대하고 일탈적이고 변태적 쾌락주의로 변질되며 이는 기본적인 성과 규범을 하나씩 무너뜨려 나간다. 기본적인 기강과 질서가 흔들리고 무너지기 시작하면 가정이 무너지고 이어서 사회가 무너지고 곧 거대한 국가와 제국이이 외부의 충격에 쉽사리 무너지게 된다.

2.비교와 이기의 시스템: 저출산
요즈음 젊은이들이 결혼을 잘 하지 않고 아이도 잘 낳지 않는다. 왜 그럴까? 누구나 멋지고 이쁘고 잘 살고 성격 좋고 집안 좋고 학벌 좋고 키 크고 몸매 좋은 사람을 찾는다. 아주 이상적인 확률을 기대하다 현실의 삶을 놓치는 오류를 범한다. 이전에 비해 미디어 매체들이 발전하면서 젊음이들의 연애 대상의 기준은 점점 높아지고 있고 그를 충족시키기위한 성형과 허영을 통한 비교우위는 점점 도를 넘어서고 있다. 절대적 기준이 아닌 상대적 기준들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자신은 손해를 보지 않으면서 비교우위의 배우자를 찾으려 노력하는 추세다.
이렇게 연애와 결혼율이 낮아지다 보니 당연히 출생율도 낮아지고 있다. 피임기구들을 통해 출산도 조절이 가능한 시대이다 보니 자신의 생을 아이와 육아에 투자하기 보다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판단되는 이기주의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있다. 그래서 결과론적으로 아이를 전혀 낳지 않거나 낳더라도 하나만 낳아서 기른다. 이전에는 노후와 장례를 위해 아이를 낳아 길렀다면 이젠 자신의 노후는 다양한 보험상품이, 장례는 맞춤형 상조회사가 모두 처리해주는 세대이다. 그렇다 보니 자신의 짧은 노후와 일시적인 장례를 위해서 자신의 젊음을 모두 육아와 양육에 소진하는 건 불가피하지 않으면 피하는게 상책이 되어버렸다.

3.갈등의 다변화: 성향/종교/인종/라이프스타일
옛날 교통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지역주의에 근간한 갈등이 거의 주를 이루었다. 지역주의는 혈연과 지연을 기반으로 학연으로 또는 더 나아가 정치 성향으로 확대 양산되곤 했었다. 예를 들면 영호남의 갈등은 신라와 백제시대부터 계속 되어왔던 대표적인 지역주의 싸움이였다. 하지만 점점 교통과 매스컴이 발달하면서 갈등의 요소는 점점 다양화되고 또한 특정 이슈에 따라 자신의 성향이 어떠한지가 중요 갈등의 변수가 되었다. 이전엔 하나의 정치 성향에 따른 이진법적 분류법이 적용되었지만, 현대에 들어서면서는 새로이 대두되는 이슈에 대한 가치의 가중치에 따라 갈등의 양상도 점점 다변화되고 있다. 예를 들면 동성애, 대북관, 재벌관, 현대사관, 미중일 외교성향, 사건사고 시각 등 다양한 이슈에 따라 갈등의 양상도 천차만별이다.
이러한 갈등은 이슈화가 되지 않으면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기에 추후 문제가 될 잠재적 위험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 이슈가 문제로 부각되면 시한폭탄의 도화선처럼 쉽게 꺼지지 않고 그것이 터진 후에야만 수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요즘에서야 이슈가 되는 것들은 그 고름이 커져서 이제사 터진 것들이다. 따라서 위정자들의 역할은 그 이슈들이 수면위로 따오르기전 도화선에 불이 붙기전에 힘의 균형추를 잘 조정해주는 일일 것이다. 갈등이 표출되어 싸움이되고 충돌이 되면 분명 어느 한쪽은 피를 흘리거나 둘다 멍이 들게 되어있다.
예를 들면 문명의 충돌로 야기된 이슬람의 동진의 예를 보자. 한국에서 이슬람 이야기를 꺼내면 피식 웃겠지만 사실 이슬람의 위력은 기하급수적인 그 성장력에 있다. IS의 이슈만 보더라도 미국이 그렇게 제재를 하는 중에도 몇년사이에 급성장하지 않았는가. 한국은 아직은 이슬람의 힘이 미비하지만 곧 이슬람 세력은 커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우선 화교만큼 석유 자본력이 상당해서 상당한 투자력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좋은 투자처로 거론되고 있고 송도 국제도시의 투자규모 등을 보더라도 한국에서 이슬람 세력과 인구수는 늘어나는 추세이다. 한국은 이미 제2외국어로 이슬람을 가르치는 곳도 많고 수능시험도 이미 출제가 되고 있다. 또 무엇보다도 이슬람 인구수가 늘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한국의 저출산을 대체할 노동력은 동남아시아인들이 될 가능성은 아주 높고 그들은 대부분 이슬람교이기 때문이다. 또 이슬람권은 일부다처제에 다산을 미덕으로 여기기에 인구성장률은 상당할 듯하다. 그나마 현재는 무교를 기반한 중국 공산당이 이슬람 동진의 든든한 방어막이 되어주고 있지만 중국이 점점 개방되고 자유주의화 되며 중앙집권이 약화될수록 신장위그루 자체주보다 작은 한국의 이슬람화는 어쩌면 쉬울수도 있는 생각이 든다.
또한 크리스트교의 쇠락도 갈등의 주요 요소가 될 것이다. 크리스트교는 미국의 대한민국 통치이후 대한민국의 주요 종교로 50년 가까이 위세를 떨쳤다. 대한민국 건국의 주요 인물들도 크리스트교였으며 초대 대통령부터 크리스트교였다. 고려가 불교로, 조선이 유교로 나라를 다스렸다면 대한민국의 통치에는 크리스트교의 세계관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보여진다. 대한민국의 곳곳에 빛나는 붉은 십자가를 보아도 생각보다 크리스트교는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반증한다. 그런 크리스트교의 신자수가 점점 줄어들고 그 힘이 줄어 들고 있음은 종교적 측면에서 힘의 균형추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이러한 종교적 변화는 미미한 추세라고 여겨지지만 이런 가치관의 변화는 곧 정치나 법규의 성향의 변화로 표출될 것이고 대한민국의 갈등의 여지로 남을 것이다.

4.현실의 탈네워크화: 현실보다 미디어
새상이 점점 기계화 컴퓨터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현살의 인간관계조차 SNS를 통해 맺고 만족하며 지내는 추세이다. 현실속의 가족과 친구와 직장 동료를 만나기보다 컴퓨터속 이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심지어 집안에서 물좀달라는 것조차도 문자나 SNS를 보내는 사람도 생겨났다. 현실에서의 부대낌보다는 자유롭게 맺고 끊고 조절이 가능한 SNS를 선호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SNS를 통해 소통함으로써 기존의 온정과 미운정을 잃어가고 았다. 온정이 사랑이란 끈으로 서로를 이어주는 것이라면 미운정은 갈등과 그 해소를 통해 맺어지는 교류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서로의 체온과 미소와 눈빛을 스스로 포기하지 말자. 그렇지 않으면 현실의 세상은 더욱 삭막하고 사랑이 식어지며 헌신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껏 인류가 쌓아왔던 인류애의 체온과 온기를 소멸시켜가는 어두운 퇴화를 겪어나갈 것이다.

-생각나면 더 이어서 써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