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사상과의조율

욕구로의 갈망-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별신성 2014. 11. 9. 11:24
사람은 살아있는 생명체다. 이때 살아있다는 의미는 무슨 의미일까? 물론 생물학적으로 신진대사를 유지하는 유기체라는 일차적 의미도 포함되겠지만, 무언가 목적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고차원적 의미도 포함이 된다. 이 목적이라는 의미는 해석이 좀 난해하지만, 그 심리적 바탕은 이루고싶픈 욕망을 전재로 한다. 익히아는 스토아학파처럼 연역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에피르스학파에서나 언급하는 욕망이라는 단어는 좀 저질스러워 보이겠지만, 인간을 이루는 심리기재중에서 욕망이라는 요건을 빼놓을수 없음을 프로이드가 먼저 나서서 많은 이야기를 던져줬다. 욕망이라는 것이 무의식과 자아, 초자아사이에서 얼마나 충족되고 결핍되느냐에 따라 인간의 삶의 방향성이 좌지우지된다고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욕망과 욕구는 인간 삶에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며, 이것은 인간이 앞으로 나아가고 삶아가게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즉, 욕망 없다는 것은 인간이 식물화된다는 것을 넘어 생명체이기를 포기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매일 살고싶다는 욕망과 죽고 싶다는 욕망에서 살고싶다는 욕망을 추구하기에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살아가고 싶은 욕망이 충족되면 이제 우리는 무슨 욕망을 향해 나아가야할까? 다음 고민에 돌입한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 갈 부분이 있다. 욕망이라는 단어는 목적이란 단어로 바꿔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이것은 문장에서 사용되는 형용사적 미사어구의 차이일 뿐이다. 살고싶다 의미는 욕망이고, 잘 살고 싶다는 의미는 목적같은 그런 의미의 느낌 차이라고나 할까? 왜 잘 살고싶다하는 말은 욕망이 될 수 없겠는가? 한자인 욕(慾)자가 '바라는 욕심'의 의미라서 저차원적 단어로 인식하는 것은 형식화된 유교적 발상일뿐, 보통 인간을 살아가게하는 원동력이 욕망이 됨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욕망이 욕구로 발현이 될 때 이것의 목적이 저차원의 생물학적 목적이냐, 아니면 고차원의 철학적인 목적이냐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고차원적 목적은 저차원적 목적을 바탕으로 한다고 매슬로우는 욕구 5단계설에서 이야기한다. 인간의 욕구는 생리적 욕구 -> 안전하고픈 욕구 -> 친하고픈 욕구 -> 존경받고픈 욕구 -> 자아실현의 욕구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죽음앞에서 초연한 분들도 계시지만 인간은 보통 이런 욕구의 단계를 거친다.
이제 본론을 이야기해 보자. (본론은 저차원적일 수도 있고 고차원적인 수도 있으며 이 두가지 욕구안에서 취사선택해서 작성된다.) 나는 무슨 말이 하고프기에 욕구를 들먹거리는 것인가? 참고로 나는 저차원적 욕구를 고차원적 욕구로 미화해서 포장할 의도는 없다. 저차원적 욕구를 행동으로 하면 그사람은 저질스러우며, 글로써 표현하면 고품격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밥을 먹고 싶다고 해서 밥을 먹으면 저질인 것이고, 시로써 "배고품에 겨워 배고픔을 먹고 있다."라고 글을 쓰면 그것은 고품격인 것인가? 아니다. 둘다 배고프다는 욕구안에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 그 욕구들은 동등하며 표현만 달랐을 뿐 동일한 욕구단계를 갈구하는 것이다. 어쩌면 시인이 "배고픈데 누가 나에게 밥좀줘!"라는 의미를 어느 누구도 해석해 내지못한 애석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직접 밥을 찾아 먹었은 누군가가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다. 사랑을 하고프다고 백날 글을 쓰고 기도를 한들 사랑을 찾아서 발품을 파는 이를 어찌 따라 잡겠는가? 우리는 좀더 냉철하게 현실적으로 목적를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럼 요즘은 어떤 목적들이-다른 말로 욕구들이 유행하고 있을까? 과거에 회자되던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요즘은 잘 맞지가 않는다. 아마 욕구 단계설이아니라 욕구 상호작용설로 불러야 할 듯하다. 예를 들어 1단계인 성욕을 보자. 자 성욕이 일어난다. 성욕을 풀 상대가 없이 해소가 되는가? 그 상대를 구하려면 3단계의 욕구단계인 친하고 사랑받고픈 사람을 찾게되고, 그런 사람을 찾게되면 또 몸매도 좋고 이쁘고 잘생기고 존경받는 4단계의 사람을 찾게된다. 물론 5단계의 욕구를 이룬 사람과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면 더 황홀할 것이지만 현실성은 희박하다. 그럼 식욕은 어떨까? 멋진 레스토랑에서 감미로운 음악을 듣으며 멋진 사람과 사랑을 속삭이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고는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개처럼 사료를 먹어대는 시대는 한참전에 지나갔으며 아마도 인간의 식욕은 처음부터 그런 형태로 나타나지도 않았을 듯하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머물던 욕구들이 상호 작용하는 욕구들로 바뀌어 가면서 우리의 욕구는 좀더 복잡해졌다. 1차적인 식욕과 성욕, 수면욕조차 좀더 멋지게 하고픈 욕구가 마구 불타는 것이다. 그중 가장 고민되는 부분은 역시 성욕이다. 성이란것이 혼자 할 수 있는게 아니다보니 좀더 많은 상위의 욕구들이 관여하게되고 이것이 서로 이슈가 되고 문화가 되고 또는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기본적 욕구가 성이라고 아무하고나 무덕대고 성관계를 할수는 없지 않는가? 여기서는 먼저 성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콘돔의 시대에 태고적 성윤리관을 적용하여 부부관계에만으로 성을 국한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가 하는 문제도 발생한다. 또 성관계를 하려면 상대가 필요한데 이를 고르는 기준이 높아진 문제도 있다. 알다시피 우리의 이쁘고 잘생긴 외모의 기준은 화려한 미디어를 통해 아주 확고히 높아져 버렸다. 거기다 이젠 이전의 백마탄 왕자처럼 벤츠나 BMW를 탄 왕자님과 사랑을 나누고픈 욕구도 숨길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우선 상대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하는 기준이 높아지다보니 몸짱을 만드느라 피트니스클럽, 성형수술, 다이어트 등 국민적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다. 또 사랑의 기준이 높아질수록 연애와 결혼이 늦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이고 저출산과 고령화같은 뻔한 사회 이슈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이 문제는 개인의 1차원적인 성욕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다.
나도 미디어에 노출된 사람으로서 여기에서 자유롭다고는 말을 하지 못한다. 몸짱에 미처 성형중독에다 거식증에 걸려 쫄쫄 굶는 사람들을 보면 혀를 차다가도 나조차 그런 멋진 몸을 만들려고 부단히 운동하고 이쁜 여자를 보면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의 욕구는 삶의 목적과 깊이 상호작용하며 관여하고 있기에 자신의 욕구를 하나하나 되짚어볼 필요는 있다. 좀더 나아가 높은 욕구로 삶을 승격시키는 것이 단순한 삶에다 의미를 부여하는 좋은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문득 보이기엔 3차원의 욕구를 가정했지만 실재로는 1차원적 욕구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문득 발견한다면.. 이럴땐 아직도 나비로 진화가 되지못한 꿈틀대는 애벌레마냥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그 투자했던 시간과 열정이 너무 아까워 낙심되기도 할 것이다.
그런 때를 대비해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자신의 욕구를 돌아보자. 꿈틀대는 나의 욕구를 최대한 사랑하며 욕구를 즐기며 그 욕구와 싸우지 않고 때로는 욕구를 참으며 자신의 욕구를 통해 더 큰 자신을 만들어가길 바란다. 나도 나의 욕구를 하나하나 떠올리며 그 길다란 이름을 불러본다.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지금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