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숙제, 작은 숙제
- 날짜: 2014. 3. 26.(목)
- 날씨: 엄청 맑다 못해 엄청 더움
- 오늘의 착한 일: 해아래 새것은 없다는 비밀 지킨거
어디가 시작일까?
시간은 나에게 시작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내가 태어난 시점이 시작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그렇다고 그 과거 일들을 다 추적할 만큼 나는 그리 한가하지 않은 척. 그래서 나는 내가 태어난 때를 시작이라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무의미한 '시작'이기에 나는 어딘가에 있을 '끝'도 고민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끝도 없이 살아내고 있었다.
오늘은 무엇을 해야할까? 숙제가 주어졌다. 큰 숙제, 작은 숙제. 큰 숙제는 내가 내는 숙제. 작은 숙제는 다른 사람들이 내는 숙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하는 숙제는 어제와 같은 삶을 복사하는 일. 하루는 그렇게 순식간에 복사가 되었다. 기상하기, 정리정돈을 시작으로 상쾌한 하루를 연다. 어디서 눈으로 흘러들어온 빛은 나의 뇌를 새롭게 포멧해 주었다. 이제 수영장가서 어제의 옷을 벗고 어제를 세척한다. 땀을 빼면 어제의 자취는 금방 봉수아 물처럼 금새 빠져버릴 것 같았다. 물살을 가르며 근육의 탄성이 물속에 메아리치도록 열심히 어제를 씻고 투명한 오늘을 소환한다. 투명한 수영장의 물처럼 오늘은 그렇게 청명해야한다는 율법을 수호하는 용감한 대한의 청년. 접영보다 자유형을 내가 잘 못하는 걸 느낄 때마다 나의 오늘은 숙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오늘 미쓰리는 쌍꺼플의 붓기가 어제보다 빠졌네? 이런게 나에게는 무척 중요한 일인 것처럼 매 순간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며 숙제를 푼다. 오늘은 다이빙이 있었다. 뒤에서 달려와서 점프. 풍덩. 투명한 공기에서 투명한 물속으로 용질이 바뀌었다. 나의 피부와 투명의 경계에 피부들은 뻐끔거린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본다. 투명하게 살고파. 자유롭게 살고파. 저 넓은 바다로 가고파. 시끄러 조용히 해. 조금있다 회사 가야하는데 가당키나 한 소리니? 나는 피부들의 아가미를 막아버리고 유유히 물속에서 헤엄을 친다. 이 깊이. 딱 내 키의 깊이. 나는 이정도의 수압 물침대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두렵지도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안락함. 하지만 이내 내가 숨을 오래 참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밖으로 나가자. 조금전에 추락의 스릴을 만끽하기도 전에 나는 다시 물밖으로 나와야하는 처량한 인간이였던게지. 왜 신은 인간에게 아가미를 주지 않은 걸까? 또 떨어질 줄 뻔히 알면서 날개도 주지 않았네. 신이 또 숙제를 던졌다. 열심히 수영을 한다. 헉헉 대면서도 수영을 한다. 왜? 곧 끝날 걸 아니까. 아이러니한게 아주 숨이 차 미치겠는데 곧 끝난다는 희망때문에 그렇게 더 헉헉대며 한다. 그 휴식시간 때문에. 뒤로 누위 배영을 하면 이대로 둥둥 떠다니고 싶다. 둥둥 배. 그렇게 호수위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떠다니고 싶다. 그래도 그럴수 없다. 숙제가 계속 쌓여가기 때문이다. 이제 수영을 마쳤으니 스트레칭을 한다. 어깨, 허리, 목, 팔 모두 수고했다고 존재감을 풀어준다. 그 짧은 수영을 하고 난뒤에도 이렇게 몸을 스트레칭을 하는데 '몸이외의 나'는 정말 스트레칭을 안한 것 같다. 아자 아자 화이팅으로 힘차게 수영장을 울리고 수영을 종료한다. 화이팅. 그건 이제 새로운 숙제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흐르는 따뜻한 물에 내몸을 내던진다. 주르르륵. 샤워기도 숙제를 하느라 우는건가? 하지만 내 알바 아니다. 내 숙제도 버거운데. 샤워기 소리를 바꾼다. 쏴아아아. 따뜻한 물분자가 내몸의 탄소와 부딪히는 소리. 어떤 세포는 입을 벌리고 물을 마신다. 갈증의 해소. 알몸. 나는 알몸이다. 이 상태 그대로 가 너무 좋은데 이상태로 나갈수는 없기에 여기서 최대한 알몸을 만끽해야 한다. 밖으로 나가면 또 숙제가 있다. 아뿔싸. 방심한 사이 숙제가 떨어졌다. 수염은 최대한 깔끔하게 깍아야 상대방의 미의 기준을 충족시킬수 있다. 샴푸로 머리의 지방기를 제거하고 바디샤워로 나란 체취를 최대한 지워야한다. 수영복도 탈수하고 머리는 잘 말려야한다. 건조한 피부를 위해 바디로션을 바르고 옷은 정갈하게 입고 수영장을 나선다.
그리고 그러기 무섭게 회사라는 숙제가 던져졌다. 풀지 않을 수 없을까? 매일 고민하는 문제이다. 그래도 공식이 있기에 매일 잘 풀어내고 있다. 하지만 가끔 응용문제는 가끔 골머리를 썩인다. 이 회사에서의 작은 숙제들. 사실 내 노트가 아까운 숙제들이다. 나는 노트를 아기자기하고 이쁘게 적어가고 픈데 매일 노트를 뒤져보면 갈기갈기 휘갈겨 적어서 나도 내가 왜이러나 싶을 때가 있었다. 그대서 회사의 8시간 숙제는 매일 풀고도 어떻게 풀었는지 생각도 잘 안난다. 이때 쓰는 마법은 스킵(skip)! 퇴근을 하자. 숙제를 잘 풀었나 점검하는데 어머니께 전화가 와 숙제를 던져준다. 결혼, 재생산의 작은 숙제. 사실 이미 누가 냈던 문제이고 아직 다급한 숙제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머니는 오늘따라 아주 급한 말투로 그 시급성을 홍보한다. 이때 쓰는 마법은 역시 스킵 패쓰. 작은 숙제들에 지친 나는 나의 공간 인터넷을 켠다. 재미있는 기사. 늘씬한 미모의 그녀가 방긋 상큼한 기사와 이미지 파일로 내 영혼을 위로한다. 그때 아뿔싸. 방심한 틈을 타 인터넷이 숙제를 던진다. 재테크. 그래 돈 중요하지. 자본주의 세상에서 널 너무 사랑하지 못한 내 잘못이 크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돈이 없다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겠지. 암 중요하지. 내입은 항상 돈을 먹고 사는데 말이야. 그런데 이 숙제도 어제도 듣고 그저께도 들어서 풀기가 싫었다. 작은 숙제들. 선생님이 모두에게 내준 숙제들에 내가 내 인생을 바쳐 충성을 다해야하기엔 내 평생이 한번뿐이고 엄청 짧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누가 개구라를 치더라도 나는 내 인생이 짧다는 사실, 그 팩트를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이때 아뿔싸. 큰 숙제가 던져졌다. 내가 내게 내는 숙제. 넌 누구니? 넌 어떤 사람인거니? 넌 어떤 일을 하고 있니? 무얼 하고 싶고 할꺼니? 근데 지금 무얼 하고 있니? 쏟아지는 큰 숙제들. 사실 큰 숙제들은 항상 고민해도 답이 없다. 작은 숙제들은 선생님이 내어서 엄마나 아빠의 공식을 참고하거나 급하면 현호꺼나 현주꺼를 보고 빼낄 수도 있는데 큰 숙제는 나에게만 내는 거라 답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풀어야겠지. 오늘도 고민하며 끙끙대며 숙제를 하고 있다. 나중에 맞지 않으려면 최대한 주어진 시간안에는 숙제를 완료해야한다. 눈을 감는다. 나를 이루는 원소는 무엇일까? 이런 뚱딴지 같은 소리로 숙제를 때우려하다가 숙제를 찬찬히 풀기로 다짐을 한다. 팬을 든다. 내 두 손이 팬이고 내 두다리가 팬이고 내 이 초롱초롱한 눈빛이 나의 팬이다. 일필휘지하는 나의 큰 숙제. 선생님께 도장 받으러 가야지. 참 잘했어요. 그 말한마디가 내 굳은 영혼에 스트레칭이 되길 바라면서.
- 오늘의 잘못한 일: 일기 안쓴 거
- 내일 할 일: 어제랑 아빠랑 팀장님 복사하기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됩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 것입니다.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습니다."
- Ecclesiastes 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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