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수)필

아빠, 왜 세상 사람들은 힘들게 살아요?

별신성 2023. 4. 16. 15:47

'당연하다 생각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은 애를 키우면 깨닫게 된다. "아빠 이건 뭐예요?"로 시작하는 존재에 대한 궁금증. 그 질문에 나는 '내가 모든 존재를 다 알 수는 없구나'하는 인식에 이른다. "아빠 도로에 날아다니는 저건 뭐예요?" 보니 무심히 보던 베트남 가로수가 어느새 꽃이 지고 씨앗이 민들레씨처럼 날아다닌다. 사실 나는 저 가로수의 이름도 모르기에 가로수의 씨앗 이름도 당연히 알 턱이 없다. "아 저거는 가로수의 씨앗이 날아다니는거야." 그냥 그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해주고 넘어가기 바쁘다. 더 질문이 이어지지 않길 바라면서 날아다니는 눈같은 씨앗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런데 문득 이런 질문이 날아오면 어떨까? "아빠 죽음이 뭐예요?" "생명이 뭐예요?" 이런 질문.. 뭔가 당연하게 아는 것들이지만, 현상으로도 설명해주기가 참 어렵다. 특히 어린애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기는 참 난감하다.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시기가 지난 아이들은 이제는 가치에 대한 질문을 시작한다. "왜?" 그 무섭다는 왜?란 질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란 사실(현상)보다 굉장히 더 많은 고민을 선사한다. 나름 멋있게 답을 해주면서도 속으로는 '그러게 왜 그렇지? 왜 그래야 할까?' 질문을 곱씹으며 나를 철학가로 만들어 버린다. 예를들면, "아빠, 원준이 할머니는 왜 죽었어요?" "아빠, 조이가 왜 머리가 아파요?" "아빠, 레아가 왜 사고가 났어요?" 이런 가치에 대한 단순한 질문들은 답하다 보면, 결국 내 속이 복잡해져서 '어디까지 알게해줘야하지?'란 절제의 기준을 고민하게 된다. 그러다 아~ 더이상 질문은 하지 말아달라는 갈망이 싹튼다. 하지만 이런 질문의 후속타로 이어질 예상 질문 스쳐지나가며 뭔가 나를 두려움 속으로 몰고간다. "아빠, 왜 세상 사람들은 힘들게 살아요?" "아빠, 왜 세상 사람들에게 아픔이 있죠?" "아빠, 왜 사람들은 늙고 죽어야만 해요?" "응.. 그건 말이야..." "음.." '그러게. 왜 그럴까?'
1. 아픔과 괴로움의 근원을 찾아서
세상의 법칙에는 인과론이 있다. 원인이 있으니까 결과가 있는 것이다. 시간의 지배를 받는 인간에겐 좋은 역추적법이다. 세상에 아픔과 괴로움이 있다면 필시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인간의 고통의 대부분은 인과론으로 설명이 가능한 부분이 있다. 질병이나, 사건사고 등은 그 원인이 되는 이유가 분명히 있기에 설명이 가능한 부분이 있다. '왜 지금 내가 이렇게 힘들까?'란 원인을 먼저 적어보자. 커다란 백지 가운데 나란 나무를 그린 후 그 원인의 가지들을 뻗어 그리다 보면, 다양한 원인들이 나를 힘들게 함을 금방 알 수 있다. 부모의 재력,  유전자, 가정 환경에서 말미암은 1차원적 원인에서부터, 누군가와의 불화, 오해, 질투, 시기 등 2차원적인 원인들까지, 모두 추론이 가능한 원인들이다. 그런데 그 원인들이 꼬리를 물기 시작하면 문제가 좀 복잡해 진다. 그 고통의 맨 처음엔 무엇이 있을까? 누가 처음 문제를 일으킨 걸까? 자라면서 당연히 물려 받았다는 고통의 원인들. 처음 고통은 어디서 왔을까?라는 진지한 물음표는 결국 마침표로 끝나버린다. 최초의 인간이 저지른 무언가가 있는 걸까?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일까?  아니면 고통이 자연히 생겨난 것일까? 이 고통의 문제는 많은 철학가의 화두였다. 그래서 나까지 기름을 끼얹을 필요는 없다. 모두다 철학가마다의 결론들이 있으니까. 나는 그만큼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똑똑하지도 않다. 하지만 바보같은 내가 아주 평범한 나의 결론이라면 우리 딸도 이해하지 않을까? 그래서 딸에게 미리 대답하는 느낌으로 그 근원의 해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자, 그러면 내가 생각하는 고통은 어디서부터 왔는가? 딸아 잘 들어보렴.
2. 고통이 지나가는 순간 포착
'고통이 어디서 왔는가?'란 질문은 진지하게 고민해도 답이 언듯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고통이 어디로 갔는가?'로 질문을 바꿔보면 해답이 멀지 않음을 직감할 수 있다. 고통이 어디서 오기만 왔다면, 모두가 고통속에 몸부림치며 살겠지만은, 현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면 고통이 어디로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면 고통은 어디로 갔는가? 어떻게 사라졌는가? 그 이유는 인간이 무언가를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것을 살펴보면 참 단순하다. 고통이 본능적인 욕구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허기를 면하고 생명을 유지하려는 욕구로서 가장 기본인 의복, 음식, 가택을 향한 욕구에서 성욕까지를 포함한다.
  • 안전의 욕구(safety): 생리 욕구가 충족되고서 나타나는 욕구로서 위험, 위협, 박탈(剝奪)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불안을 회피하려는 욕구이다.
  • 애정·소속 욕구(love/belonging): 가족, 친구, 친척 등과 친교를 맺고 원하는 집단에 귀속되고 싶어하는 욕구이다.
  • 존중의 욕구(esteem):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인간의 기초가 되는 욕구이다. 자아존중, 자신감, 성취, 존중, 존경 등에 관한 욕구가 여기에 속한다.
  • 자아실현 욕구(self-actualization): 자기를 계속 발전하게 하고자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욕구이다.  -@위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설에 따르면 1.생리(생명) 2.안전 3.애정/소속 4.존중 5.자아실현 등 많은 욕구들이 있다. 그 욕구중에 하나라도 채워지지 않으면 불만족이 되고, 그 불만족이 쌓일 때 고통이 뒤따르게 된다. 결국 인간이 모든 욕구를 채우려할 때 고통이 배가 되고, 반대로 욕구에서 자유로운 인간일 수록 그 고통은 사라진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 이론이 이런 절차를 잘 표현한 단어같다. 그러면 '욕구에서 자유로우면 되지않나?' 싶어도 이게 그리 말처럼 쉽지가 않다. 모든 욕구는 하위 욕구의 충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자아실현까지는 아니더라도 각 욕구들은 하위 욕구의 충족을 원한다. 또한 제일 기본적인 생리의 욕구는 삶에 대한 애착을 포함한다. 이 살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욕구이다. 그래서 이를 포기하는 사람은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면 인간이 살고자 하는 욕구까지 내려놓을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바다에 표류하며 망망대해에서 몇달간 굶는다면 그 사람은 사는 의미가 없을테니까. 그래서 보통의 인간은 각 욕구의 100% 충족이 아닌 자신만의 역치까지만 채우고, 나머지는 포기하는 습관을 학습해 둔다. 예를 들면, 매일 간단히 끼니를 해결한다거나, 특정한 장소 위주로 머문다거나, 친한 친구 몇명만 사귄다거나, 자신만의 취미를 즐긴다거나, 인생 목표는 이룰 수 있는 정도로만 설정하는 것 등이다. 그러면 여기 욕구중에서는 1단계인 살고자 하는 욕구가 가장 강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비롯되는 문제가 하나 생긴다. 왜 인간은 살고자 하는가? 왜 우리는 죽기를 싫어하는가? 도대체 죽음이 뭐길래 우리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가? 생명이 끝나는 것에는 엄청난 육체적인 고통이 있어서라는 이유 때문일까? 물론 생의 마감을 위해서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은 엄청나다. 칼이든, 총이든, 육체를 죽음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혈압, 맥박, 호흡, 체온 등을 역치 이하로 끌어내려야 하니까. 그러나 안락사를 허락한 유럽처럼 죽음이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죽음에 지래 겁먹고 있을까? 존재를 부인해야해서 일까? 죽음의 고통은 아무도 설명하는 사람이 없어서일까? 거기에 더 상상력이 가미되어 더 고통스럽게 와닿는 걸까? 과연 죽음이란 고통은 극강의 고통일까? 여기에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을까? 하지만 가끔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들-독립투사, 성인, 의인들 등을 볼 때, 그렇게 죽음이 초월적인 법접할 수 없는 영역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럼 혹시 나도 죽음이란걸 당당히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여기서 생기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그러면 왜 인간은 죽어야 하는가? 고통만 있으면 되지 왜 꼭 죽어야 하는가? 나란 존재가 왜 없어져야 하는가? 여기서 존재라 함은 육체적인 존재로 제한하자. 즉, 질량과 공간을 차지하는 존재란 뜻이다. 왜 나는 내 존재를 없애야만 하는가? 누군가가 만든 법칙인가? 아니면 유한한 지구를 폭발시키지 않고 유지하는 안전장치같은 시스템인가? 죽음은 그렇다치자. 그러면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전 단계, 즉, 인간의 노화는 왜 있어야 하는 것인가? 인간은 왜 늙어야하는가? 인간이 이루고자 하는 고차원적 자아실현의 욕구와는 정반대되는 시스템을 누가 만든 것인가? 죽음을 위한 일종의 '내려놓음'의 배려인가? 하지만 이 모든 질문에도 현실에서 존재하는 노화와 죽음(소멸)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해답은 없다. 그래서 다양한 종교가 그 원인과 결말을 제시하는 것 아닐까. 알 방법이 없으니까. 그러면 과학으로 알 방법이 없으니 모두 종교로 회귀해야 할까. "아빠, 세상은 왜 고통스럽게 만들어졌어요?" "예수님을 믿자 딸아." 이런 변증법이 너무 은혜롭게 들리지 않는 것은, 그 고통의 현실과 내 딸은 수많은 고민과 시간을 들여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 딸의 고통에 공감하는 아빠라면 종교는 나중의 문제이다. 현재는 딸과 함께 고통의 문제를 직면하고 같이 아파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딸의 고통을 나누면 반이되길 바라면서. 
3. 이 또한 지나가리라
아쉽게도 고통의 문제에 정답은 없다. 그래서 수많은 현인들은 번뇌에서 해탈하거나, 고통을 용인하며 같이 동고동락했다. 고통의 원인인 욕구도 나와 동고동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생긴 유명한 말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이다. 결국 고통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나에게 당면한 현실이자 문제이자 피할 수 없는 존재(사실)이다. 그렇다고 무언가 피할 해답을 알 수도 없다. 그 해결책도 상황에 따라 복잡하다. 그래서 현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익힌 건가 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모든 것이 지나간다. 시간이 흐르듯이 모든 것은 흘러간다. 존재도 그렇고 고통도 그렇다. 그렇게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면 나중에 무엇이 남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시간과 공간도 처음 빅뱅처럼 태어 났다면 세상도 결국 죽지 않을까? 그러면 세상도 나처럼 죽음에 대해 고통스러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 고통의 고민들을 나처럼 같이 하고 있지 않을까? 알 수는 없다. 다만, 그 모든 것의 끝이 내가 아니기에 맨 마지막의 누군가는 그 끝을 보고 설명해 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