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존재하는 것과 느껴지는 것의 모호한 정의의 경계
누가 그 경계선을 그어줄 것인가?
#1.2 향기란 모호한 정의
잔잔한 호수의 물결이 물표면을 간지럽히며 밀려오더니 보리밭처럼 빼곡한 수초사이로 도망치듯 멀리 사라져 버린다. 잔 물결들은 심심했는지 여기 저기서 다시 되돌아와서는 수줍음많은 수초들을 또다시 간지럽히고 있다. 머언 항해에 지친 호수의 물결들이 잠시나마 쉬어가는 둥근 연잎의 마을. 그곳엔 내가 좋아하는 태곳적 수수한 향을 가진 그녀가 있다. 물론 그녀는 아직 향기를 알지 못하기에 그 매력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지금 그녀는 햇살과 안개를 적절히 썩어가며 부드러운 심호흡을 하고 있다. 잎을 적신 안개 빗으로 자신의 멋진 향기를 고양이가 털을 고르듯 조심스레 가다듬고 있다.
"안녕~가시연꽃. 난 리겔이라고 해"
"어~안녕. 근데 어디에서 이야기하는 거야?"
가시연꽃이 의아한듯이 물었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이런 대화가 신기했으니까 말이다. 아마 속으로는 자신이 이상한 건 아닌가하고 아침부터 뒤숭생숭해할 것이다.
"물론 너의 옆에서 이야기하는 거지."
"그런데 너의 꽃은 안보이는데? 식물은 맞는거야? 귀신은 아니겠지?"
"응..향기로 이야기하는 거야. 사실 나는 사렛 마을의 갈대언덕에 사는 장미꽃 리겔이라고 해. 너에게 나의 향기를 전하러 왔어."
"향기? 향기가 먼데? 꽃가루 말하는 거야?"
"꽃가루는 아니고..그니까 그게 뭐냐면... "
순간 나도 말문이 막혔다. 아직도 이것을 설명할만한 괜찮은 비유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향기를 설명하는 자체가 조금은 웃기는 일이다. 왜냐면 그것은 지금의 나를 정의하라는 것만큼 방대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침부터 향기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은 너무 딱딱할 것 같고, 아직 향기를 알지도 못하는 친구에게 향기를 다루는 일상이야기는 너무 난해할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지금의 상황을 편하게 이야기 해주기로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차츰 차츰 알게 될테니까 말이다.
"너도 향기를 알게 되면 나처럼 자유롭게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꺼야."
"말도 안돼. 어떻게 식물이 움직인단 말이니? 그리고 너가 사렛 마을의 갈대 언덕에 산다는 것도 내가 어떻게 믿어?"
"알겠어. 이해해. 그럼 오늘은 내 향기만 묻히고 갈테니깐 한번 맡아 보렴."
"나 지금 바빠. 대지의 장관이 요즘 재정을 줄이는 바람에 호수속 미네랄이 많이 부족하단 말이야. 뿌리를 더 깊숙히 내려야해. 그러려면 실뿌리도 더 생산해야 해. 그러려면 더 많은 햇볕을 받기 위해 오늘은 새 잎도 싹틔워야 하구 말이야"
"응. 그래. 알겠어. 요즘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흐린 날씨가 많이져서 새 잎을 틔우는데 무리가 많겠구나."
"그리고 요즈음 오리들이 계속 내 줄기를 헤집고 물어뜯는 바람에 여간 신경쓰이는게 아니야. 게다가 어디서 지렁이같은 해충까지 기어들어와서 내 뿌리를 갈아 먹고 있다구. 넌 물 속에 사는 식물의 괴로움을 모를꺼야."
"그런 일이 있었구나. 많이 바쁘겠어. 해충 문제는 빨리 해결됐음 좋겠어."
"그래. 뭐 내가 쌀쌀맞게 대했다면 사과할께. 하지만 향기로 이야기한다는 너의 말이 믿어지지 않아서 그런거니깐 이해해."
"응. 알겠어. 이해해. 처음엔 많이 낮설꺼라 생각해. 그럼 다음엔 아침말고 땅거미지는 한산한 시간에 놀러 올게. 다음에 또 보자."
좀 아쉽긴 하다. 하지만 그렇게 가시연꽃과 헤어지고 다시 베델에게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원...물론 오늘은 가시연꽃의 잎뒷면에 살짝 향기를 묻혔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하하. 거봐. 여자의 마음을 얻기가 그리 쉬운 줄 알았어?"
"그러게. 난 향기도 전하고 터놓고 일상이야기도 하며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안타깝네. 그렇게 친해지다 보면 향기도 알게 되고 나중에 같이 여행도 다니고 하면 재미있고 좋을 텐데 말이야..쩝"
"하하. 잘 해봐 친구. 언젠가 같이 여행하는 모습을 꼭 봤음 해. 언젠가 말이야. 하하. ♬사노라면 언젠가는 연예할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게 한 밑천인데 ... 내일은 연예한다 내일은 연애한다.♬ 하하"
베델의 장난기가 또 발동을 했다. 으...이 친구...장난을 다 받아 주려면 아마 내 하루가 훌쩍 다 지나가 버릴 것이다. 저번에도 곤충의 지압점을 찾았다고, 혈을 누르면 정지시킬 수 있다고, 나를 감족같이 속인 적이 있다. 베델이 메뚜기의 목부분을 장미가시로 찌르자 메뚜기가 멈추어 서길래 나도 따라서 베짱이에게 가시로 찔렀었다. 그랬더니 베짱이가 화를 내며 나에게 달려들지 않겠는가? 그게 메뚜기에게만 먹히는 침술일 줄 누가 알겠는가? 자기가 의사랍시고 어디서 괴상한 침술을 익혀 가지고서는 놀릴 때가 없어서 막역한 친구를 가지고 장난을 치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물론 그래서 내가 이 놈과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는 이유기도 하지만 말이다...
"됐어. 하던 운동이나 마저 하자. 아직 난 노의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 않아. 나는 바람보다 더 멀리 더 빨리 나가는 법을 익히고 싶다구."
"그래. 의욕 하나는 자네 따라 올 사람이 없을꺼야."
"근데 운동마치고 뭐 할 계획이야?"
"어. 네트워크를 연구하는 친구에게 가 볼 생각이야. 그 친구가 얼마전에 화상 전화의 향기를 맡고는 연구중이거든. 사실 그 친구는 인간의 인터넷망을 끌어와서 식물계에 적용할 게이트웨이를 개발중이야. 방대한 작업이지. 하지만 아마 곧 완성될꺼 같아."
"아 그 데네브라는 동쪽 둑 수문옆에 핀 나팔꽃 친구 말이지? 인간계와 식물계를 이어주는 게이트웨이가 벌써 다 끝나가는거야? 대단한데? 하긴 그 뉴스를 들은지도 시간이 꽤 지나갔으니 그럴 때도 되었군."
"그래. 게이트웨이 연구가 거의 다 끝나가니 요즘에는 새로운 아이템으로 다음엔 무엇을 할까 이것저것 연구중이라고 하더군."
"오~그 친구의 천재성은 알아줘야 한다니깐 처음에 그 이야기를 했을때만해도 꽃들이 모두 말도 안돼는 소리라고 수군거렸는데. 사실 나도 그런 게이트웨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 친구가 향기를 맡은 그 노트북에서 그런 네트워크 기능을 추출해서 그렇게 적용시킬 줄 누가 알았겠어? 그 친군 천재야 천재."
"하하. 꽃들마다 독특한 자신의 장점이 있잖아? 나팔꽃 가문들은 대대로 정보쪽에는 일가견이 있었어. 할아버님께서도 옛날부터 홍수방지 시스템을 구축하는 프로그래머였다지 아마. 그 할아버지 덕에 제2의 노아홍수는 없을꺼라 하잖나. 자타가 공인하는 훌륭하신 분이지."
"그렇지. 나도 시간만 되면 같이 가보고 싶은데 말이야.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안되겠어. 요즘 들어 희귀한 바이러스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이 좀 있어서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친구에게 자료분석을 부탁했거든. 오늘 분석결과를 알려준다고 해서 말이야. 이래뵈도 명세기 꽃의학박사인데 병명을 모른다고 대충 암인거 같다고 진단해버리면 곤란하잖아."
"그래. 자네가 여러 꽃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치료한다고 바쁜거 알아. 저번에 곰팡이 사건때도 곰팡이가 누명을 쓸 뻔하지 않았나? 그 친구 아주 혼쭐이 났었지. 우리 향기나라에서 꽃이 없는 곰팡이 친구가 누명을 쓰는건 식은 죽먹기보다 쉽지. 하지만 자네가 과학적으로 세균이 저지른 범죄란 걸 밝혀냈잖나."
"아~그 사건 이후 나도 세균들의 이중성에 대해 새롭게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지. 근데 이번엔 바이러스와 얽힌거 같아서 더 머리가 아프군."
"자네도 머리가 아파? 의사는 건강한 줄만 알았는데 말이야. 하하"
이때 석류향기가 지나다 인사를 건넨다. 이 친구는 향기로 여행을 하는 법을 안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아서 마냥 즐거운가 보다. 얼굴이 싱글 벙글이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예요. 운동하고 오시는가 봐요?"
"네. 오랫만에 운동을 했더니 향기가 많이 맑아지는 거 같네요. 하시는 음료공장은 잘 되세요?"
"네. 요즘은 구름이 많이 껴서 걱정을 했었는데 오늘은 이렇게 날씨가 화창해서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날씨가 좋아서 소풍가시는 분들이 많겠어요."
"네. 그럼~다음에 또 뵐게요. 좋은 하루되세요"
급하게 서두르시는 걸 보니 아침의 음료수 생산공장에 관리차 일찍 출근을 하는가보다. 그러고 보니 벌써 햇살은 저 산위로 떠올아 있다. 벌써부터 식물들은 태양이 주는 신선한 아침을 요리하느라 바쁘다. 인간들은 이 느낌을 모를 것이다. 이 넘치는 풍성한 추수의 느낌을 말이다. 저 건너 옥수수밭에서도 브렛이 빵을 굽느라 정신이 없어 보인다. 빵공장으로 바빠 보여서 운동하고 오는 길이라 아는척은 안했다.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베델 아침운동을 하고나니 기분이 상쾌한데?"
"나도 친구와 운동을 하니 시간가는 줄 모르겠어. 내일도 같이 운동하자구. 그럼 들어가구~ 쉬어. 리겔~. 저녁쯤 또 놀러올게."
"그래 있다보자구~ 잘가~" 베델에게 인사를 건네고 아침 운동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햇살로 포근해진 나의 아늑한 보금자리로 들어왔다.
나는 호르몬냄새가 나는 향기를 어제 모아둔 이슬로 샤워를 하며 씻어내렸다. 그리고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 안자 요즈음 유행하는 Bird-Band가 부르는 'Sun Shine"을 들는다.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게 숲속에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여러 식물들이 정성스레 만든 어제 구입한 상큼한 빵과 주스를 먹는다. 우리에게 빵이란 어제 광합성을 게을러서 못하거나 좀 더 멋진 식사를 위해 구입한 녹말 빵이다. 난 사실 내가 직접 광합성을 해서 아침을 요리하기보다는 빵을 구입해서 먹는 편이다. 옥수수빵 전문가인 브렛의 요리 실력이 나보다는 뛰어나다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런... 언제 두번째 잎에 작은 반점이 생겼지? 나중에 피부관리 전문가인 펫 아주머니께 상담받으러 가야겠다. 사실 난 향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식물들이 다른 꽃을 볼때 훤칠한 외모와 부드러운 잎을 본다는 본능마저 무시하지는 않는다.
아 벌써 약속시간이 다 되어가는군. 데네브가 기다리겠군. 서둘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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