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란 길의 시작점을 찍어주는 것뿐이다.
그 길을 목적을 향해 그려나가는 것은 땀방울의 몫이다.
#1.6 향기의 구슬과 한장의 편지
새 아침이 밝았다.
또 다시 비치는 햇살은 또 다른 시작을 알리고 있다. 어제 질 때의 태양과 오늘 뜰 때의 태양은 왜 이렇게 느낌이 다를까. 고도만 놓고 본다면 다를게 전혀 없는데 말이다. 새로이 뜨는 태양을 맞이하면서 어제 태양이 질 때의 우울함은 언제 그랬는냐는 듯 과거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모든 식물은 새로운 희망에 가득차 새로운 꿈을 피운다. 여기 저기에서 울리는 아침의 새소리는 파도처럼 산속을 울리며 메아리치고 있다.
"리겔. 일어났어? 같이 아침 운동이나 가자."
베델이다. 아침 운동을 가자고 왔나 보다. 하지만 나는 어제의 무거운 생각 때문에 오늘 아침은 좀더 누워있고 싶다.
"아니 혼자 다녀와. 난 오늘 아침은 좀 쉬고 싶어."
솔직한 내 심정을 고백조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베델은 혼자 운동가기가 심심한지 나를 위로하기 시작한다.
"어제 일은 안됐어.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까지 의기소침해져서야 되겠어? 아침에 조깅을 좀 하고 나면 향기가 한결 가벼울 꺼야. 그러니 나만 믿거 따라와~오빠 믿지?"
베델이 씨익 웃으며 윙크를 날리는 바람에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런..안 갈수가 없겠군. 그래서 할 수없이 같이 운동을 하면서 아침 공기로 생각을 씻어보기로 했다.
"오늘은 어느 코스로 안내할까...보자...아 거기가 좋겠군. 오늘은 하늘을 날아서 운동을 하자구. 저 앞산까지 같다오는 걸루. 어때? 좋지?"
"앞산? 아침부터 그 먼거리는 무리야. 나 컨디션도 안좋단 말이야. 거긴 다음에 가기로 하고 오늘은 그냥 호수 주변이나 돌자구."
"알겠어. 혹시 너 아직 가시연꽃에게 미련이 남은거야?"
"그런게 아니라 가볍게 운동하고 싶어서 그래. 또 난 산보다는 물을 좋아하자나. 특히 아침 햇살이 빛나는 물가말이야."
"그래. 알겠어. 그럼 슬슬 출발해 볼까?"
"그래. 문잠그고 나올게. 조금만 기다려."
오늘은 그리 상쾌한 아침은 아니다. 이제 일기예보대로 비는 오진 않았다. 하지만 비가 오려는 듯 아침의 해가 뜨자마자 조금씩 흐려지고 있다. 오늘의 일기 예보에 따르면 오후 비가 올 확률이 50%정도라고 했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비올 확률이 조금 내려가서 다행이다.
날씨 탓인지 어제의 사건들이 떠올라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계속 내주변을 누군가가 감시하는 듯하다. 무슨 어두운 눈빛이 나를 보고 있는 것같다. 시선을 벗어나고 파도 내 눈은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다. 범인은 누구일까? 나에게 정말 접근을 할까? 잔인한 놈들은 아니고 돈만 노리는 놈들이겠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다보니 정신마저 없다. 이미 머리 속에선 벌써 놈들과 싸우는 상상까지 하고 있다. 한 때 접었던 검도도 새로 배워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다. 이런...그만 생각하자. 운동마치고 제이 아저씨에게 아침 문안인사나 가야겠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보니 벌써 가시연꽃 앞에까지 와 버렸다.
"안녕~가시연꽃. 좋은 아침이야."
"응. 리겔. 좋은 아침이야."
순간 나는 놀랐다. 아직 내 이름을 이야기한적은 없는데 말이다. 혹시 범인이 아닐까? 저 가시로 제이 아저씨를? 아니지. 아니지. 아직 향기도 모르는 처녀에게 내가 무슨 오해인가. 범인에 대한 생각때문에 괜한 식물까지 의심하는 내 모습에 순간 더 놀랐다.
"멀 그리 놀라고 그러니? 네 이름 아는 것 때문에? 하하. 내가 향기를 모를꺼라고 생각하니?"
무슨 말이지? 향기를 안다니 이제까지 나를 속인건가? 향기를 알면서 왜 모른척했지? 이런 또 의심의 꼬리가 물고 늘어지는군. 병인가? 심리치료를 좀 받아야겠군.
"어~.네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그리고 향기를 안다는 말이니?"
"네 이름은 주위 친구들에게 물어봤어. 아름답고 멋진 장미꽃이라고 하더라. 주위에 친구들중에 널 좋아하는 애도 있는 걸 보고 놀랐어. 나는 너처럼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나도 나름 소식통은 있어. 하하."
가시연꽃이 나에게 조금 관심이 있어하는 걸 보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리고 향기에 대한 오해는 조금 아니 많이 풀렸어. 너가 갈대 언덕에 산다는 걸 아는 이상, 향기로 이동한다는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지 않니? 네가 내게 선물한 향기를 맡으면서 내 향기는 어떤 향기일까 궁금하기도 했어. 하지만 향기로 이동하게 되면 밤에 악몽에 시달린데. 그 소문때문에 향기에 대해선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기로 했어. 근데 궁금해서 그러는데 너는 나의 향기가 느껴지니?"
"당연하지. 넌 옛날에 피어난 꽃같은 수수한 향기가 나. 그리고 너의 가시때문인지는 몰라도 조금 톡쏘는 상큼함도 네 향기만의 매력이지."
"그렇구나. 다음에 향기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줘. 아 참. 미안... 내 소개가 늦었지. 네 이름은 카라야. 잘 부탁해."
나는 오랫만에 카라와 이것 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보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그리고 카라에게 내가 전해준 샤론의 향기를 느끼게 되면 향기로 이동할 수도 있으니 자주 맡아보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다음에 같이 꼭 향기로 여행을 하기로 약속도 했다. 꿀꿀했던 어제의 피로가 조금은 씼겨 내려가는 것같다. 하지만 이 어두운 시선은 아직도 나를 놓아 주기를 않는다.
그러다 멀리서 나를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있는 베델을 녀석을 보았다. 깜박했군.
"카라~이제 가봐야겠어. 친구 녀석이랑 아침 운동중이라서 말이야."
"그래. 다음에 또 봐. 향기로 운동하고 날아 갈수 있다는게 너무 부러운걸. 이 물속아닌 너의 집 갈대언덕도 구경하고 싶어."
"그래. 다음에 초청할게. 그럼 다음에 봐."
카라에게 인사를 건네고 베델에게로 급하게 달려왔다.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알기는 아는가 보지? 그래도 친한 친구가 여친 하나 생길까봐서 참는거야. 알겠어."
"알겠어. 미안해. 대신 아침은 우리 집에서 대접하지. 그럼 빨리 남은 코스나 마무리하고 제이 아저씨 병문안이나 가자구."
"그래. 제이 아저씨를 깜박할뻔했네."
베델과 나는 우리 집에서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아침을 토스트와 석류열매로 간단히 대신했다. 그리곤 서둘러 제이 아저씨께로 병문안을 갔다.
제이 아저씨는 아직 의식이 없으시다. 하지만 어제의 붉게 빛나던 구슬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저 구슬은 뭘까? 가엘 소장님께서는 여기서 밤을 지새우셨나보다. 대원들에게 맡겨도 될 일을 참 열심이 대단하신 분이다. 그래서 향기나라가 이렇게 유지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가엘 소장님. 안녕하세요?"
"그래. 간밤엔 별일이 없었나?"
나의 눈치를 살피시며 인사를 받아주시는 걸 보니 또 무슨 할 말이 있으신가 보다.
"네. 잘 잤어요. 제이 아저씨도 별일 없으셨죠? 붉은 구슬은 거의 투명해져서 이젠 분간이 안가네요"
저 구슬이 붉은 색이란게 신경을 날카롭게 했었는데 사라지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가엘 소장님?"
"그래 먼가? 말해보게?"
"어제 그 붉게 빛났던 구슬은 뭡니까?"
"자네도 처음봐서 무척 궁금하고 당황스러웠을게야. 나도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네. 향기학 이론에는 많이 약해서 말이야. 하지만 조사팀에서 향기팀장의 말로는 향기의 핵이라는 구나."
"향기의 핵이요?"
"그래. 동물들의 영혼이 뇌의 영향을 받는 건 해박한 자네도 알걸세. 하지만 우리 식물은 그런 생각을 관장하는 기관이 동물의 뇌처럼 따로 고정되어 있지 않지. 그래서 몸속 세포사이를 영혼이 자유롭게 이동을 할 수있지. 그런데 우리가 몸 밖에서 향기로 이동을 할 때는 그것이 그 구슬같은 핵속에 담기는 것 같아. 물론 평상시에 눈에 띄거나 걸리적 거리지는 않지. 그래서 동물과 달리 우리 식물들은 향기로 자유롭게 영혼이 이동할 수 있는 것이고 말이야. 동물들은 뇌가 단단한 머리속에 고정되어 있어서 영혼이 떠나면 곧 죽어버리거든. 우리가 향기로 이동을 하는 현실과는 달리 이론적으로 아주 복잡한 것만은 사실이야. 그런데 문제는 놈들이 우리보다 그런 향기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야. 제이 선생님의 부상으로만 봐도 그렇지. 우리는 이런 향기의 핵을 본 건 처음이야. 그건 그런 실제적인 사실을 위해 우리가 어떤 향기를 마루타처럼 실험하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놈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이야. 향기의 핵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고 공격하는 법도 알지. 내 생각으로는 행방불명이 된 향기들이 그놈들의 마루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다분히 있다고 생각이 드네. 그 놈들은 우리 향기의 단점을 캐내기위해 어떻게든 훔친 기술들을 활용하고 실험하고 있는 것같아. 또 부족한 정보는 어떤 인간으로부터 캐내고 말이지."
조금은 이론적인 설명이라 흘려 듣다가 마루타라는 말이 나오자 갑자기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런 죽일 놈들 같으니라고 어떻게 그 젊은 향기들을 마루타로 쓸 생각까지 했단 말인가. 잔인하기 이를데 없다. 가엘 소장님은 내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많이셔서 그런지 말을 이으셨다.
"연구원들의 말에 따르면 향기도 일종의 불연속적인 에너지라는군. 그래서 그 향기의 핵을 총으로 맞추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기술이지. 자네도 알지 않나? 원자를 이루는 거의 대부분이 빈 공간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원자의 대부분인 빈공간 중앙에 점처럼 작은 원자핵이 있지. 그 커다란 빈 공간을 전자가 채우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보지 않는가? 하지만 그 작은 몇개의 전자들이 지나는 궤도는 아주 넓기 때문에 거의 비었다고 봐도 무방해. 우리 향기도 그와 비슷하단 말이야. 사실 향기가 이렇게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도 그와 비슷한 원리지. 향기에도 전자와 같은 유동성이 제공되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런 이론만의 초보적인 기술로 그 한 중앙의 작은 핵을 명중시킨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지. 이 자연계가 그리 단순한 환경요인만 있다고 어느 물리학자도 믿지 않아. 그 놈들은 그런 환경요인들을 고려하기 위해 인간 세계의 최신 기술들을 끌어왔을게 틀림없어. 우리 향기나라의 연구진들처럼 말이야. 사실 그 연구진이란 단체도 이젠 확실히 믿지는 못하겠군. 사건이 점점 문어발식으로 연루되어가니 말일세. 그 놈들이 사용한 최신의 기술들을 자네도 듣기는 들어봤을 거네. 양자역학이나 불확정설의 원리같은 미시적인 물질을 다루는 학문을 말일세. 아직 우리 향기나라에서 그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리 많지가 않지. 그걸 실재로 놈들처럼 무기나 생활에 응용한 건 향기나라에서 아직 보지를 못했네. 저번에 열린 기술 컨소시엄에서 나노단위의 식물 수정은 꽤 참신했지만 말이야. 문제는 이렇게 우리의 기술은 나노 단위로 기어다니는 수준인데 놈들은 양자 단위로 날아다니고 있으니 문제란 말이야."
새로운 향기학의 이론과 인간세계의 이론을 들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내가 식물 신체학을 배우면서 미토콘드리아가 에너지를 생성하는 걸 직접 관찰했을 때와 비슷한 희열감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 향기나라에서 에너지 시스템 분야 정책을 개척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그건 그렇고 난 자네가 좀 걱정스럽네. 아직 젊고 유능해서 놈들이 자네에게 어떤 수작을 부릴지 알수가 없단 말이지. 암튼 경호원을 붙여 줄테니 혹시 무슨 접촉시도가 들어오면 바로 나에게 연락하게. 알겠지. 아직 놈들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자네 혼자 섣부르게 접근하다간 위험해 질수도 있어."
"네. 알겠습니다."
"제이 선생님이 의식을 되찾으시면 놈들에 대해 더 자세히 알수있을 꺼야. 그럼 자네는 바쁠텐데 가보게나."
가엘 소장님은 제이 아저씨를 보며 답답하신지 한숨을 쉬셨다.
"그럼 수고 좀 해주세요."
"그래. 넘 걱정은 말고. 우리 팀원 하나가 저번에 실종된 향기가 죽음의 계곡에서 복귀했다고 알려 주었네. 그 정보를 바탕으로 놈들의 행동반경과 움직임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있을꺼야.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해도 이 향기나라의 시스템을 무시하진 못하지. 이 문명을 움직이는 뛰어난 인재들이 포진해 있으니 말이야. 그리고 다음 사건의 핵심에 자네가 있다는 걸 우리도 낌새를 채고 있기에 놈들도 섣부르게 자네에게 접근은 못할꺼야. 그리고 이걸 가지고 가게.
가엘 소장님은 나에게 시계를 하나 채워 주셨다.
"이게 뭡니까?"
"위치추적장치일세. 혹시나 해서 말이야. 무슨 일이 있으면 거기 버튼을 누르게나. 그 속엔 방향제로 만든 화학제품이 들어있어서 놈들이 쉽사리 접근하지는 못할껄세. 접근하다가는 제이 아저씨처럼 구슬에서 피가 나오다 죽을 수도 있지. 물론 시계를 찬 자네는 자석의 N S극처럼 안전하니 걱정은 말게. 그럼 그만 가보게나."
"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엘 소장님의 여러 이야기를 듣다보니 행동을 조심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이 아저씨의 병세가 나아지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던 정신도 어느정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집에 가서 휴식을 취하고 이젠 에너지 정책간담회 결과보고서를 읽고 일할 준비를 해야겠다. 일할 생각을 하니 한결 마음에 용기가 생긴다.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도착했을 때 문을 열려 하는데 안보이던 편지 하나가 꽃혀있다. 왠 편지지? 하얀 봉투에는 보내는 발신자의 이름이 없었다. 문을 닫고 집안에서 조심스레 편지를 열어 보았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리겔 선생님.
에너지 저장과 관련한 시스템 개발을 위해 잠시 만나고 싶습니다.
오늘 저녁 11시 동쪽 보리밭 길 포플러나무아래에서 뵈었음합니다.
에너지 정책과 관련한 이야기라 보안이 요구되니 혼자 뵈었으면 합니다.
그럼 있다 뵙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에너지 정책국 차장 크류-
요즘들어 활동이 뜸하신 크류 차장님께서 왠일이실까? 그것도 조금 늦은 시간에 말이다. 궁금하면서도 옛날 날리시던 에너지 정책 실무자 선배이시기에 나가긴 나가야 될 것같다. 또 보리밭 길은 사렛마을에서도 가까우니 안전할 것이다. 만나서 요즘에 논의중인 햇볕저장 정책에 대해 작은 조언이라도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저번에 논의한 알뿌리 식물 저장창고는 비현식적인 것같다. 튤립과 같은 알뿌리 식물 속에 에너지를 저장한다는 건 튤립같은 쾌락주의자들에게 씨알도 안먹힐 뿐더러 다른 식물들이 그것을 사용하기에는 호환성 문제도 있다. 가서 실무 선배님의 참신한 경험담을 참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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