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타민 시++ /추억의습작들('08) 27

2πr[24] 옥타브에게 듣다

옥타브에게 듣다 박원주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는 신비감들이 하루가 가고 하루가 오는 일상이 되어버린 이들에게 옥타브가 들려주는 노래 이야기. "도에서 7시간이 지나면 내일의 도가 뜹니다. 오늘과 내일의 도가 소리가 다른 것은 더 높은 生의 자리로 나아가기 때문이죠. 비록 가진 피아노 건반이 모자랄지라도 더 나은 내일의 도는 울릴 것입니다. 하루의 일과를 돌아보세요. 힘든 고난의 낮은음자리를 지날 때도 있고 돌고 도는 도돌이의 슬럼프도 있습니다. 까다로운 검은 건반을 만날 떄도 있고 부족한 반음으로 지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길에 함께하는 화음이 있기에 하루가 풍성하고 아름답게 울립니다. 빠른 세상의 박자에 지칠 때면 4분쉼표와 잠시만 쉬어가세요. 아름다운 인생의 가사를 읽고 미소짓는 당신의 ..

2πr[23] 잠이 속삭일 때

잠이 속삭일 때 박원주 잠이 속삭일 때는 그냥 살며시 눈을 감아 봅니다. 죽음을 앞 둔 낙엽처럼 고운 흙을 덮고서 순전히 맨몸으로 누워 봅니다. 누구도 간섭하지 못하는 호수 속으로 조용히 노 저어 떠나가 봅니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촛불처럼 생의 자취를 잠잠히 지워가 봅니다. 꿈이 속삭일 때는 그냥 꿈과 함께 고요히 잠이 듭니다. 그대 품속의 따뜻한 꿈이 자유롭게 날개를 펴는 때까지.

2πr[22] 우울한 찬가

우울한 찬가 박원주 하늘에 구름이 뒤숭생숭 썩이더니 내 마음도 그러하다. 풀자니 막막하고 끊으려니 아쉬움이 남아 뒤엉키는 실타래. 흐르는 시간을 따라 추억들은 늙어가고 외톨이가 된 피터팬은 마음 한 켠이 비좁다. 어디선가 으스스 불어오는 찬바람에 나침반의 남극에 정박해 버린 돛의 꿈. 녹여야지 하고서 비비고 얼래어도 웃지 않는 나의 마지막 미소. 우울한 날에는 우울의 음계를 따라 우울을 노래한다. 그 놈이 지겨워지면 훌쩍 떠나려나 혹시나 그려려나 하고서 후련히.

2πr[21] 비와 선인장

비와 선인장 박원주 비가 내린다 발걸음의 사막에 내리는 간만의 홍수. 비에 빠져 죽을까봐 우산의 배를 탄다 -선인장과 비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물의 두 가지. 시나브로 나를 떠나 하늘과 동거하던 비가 다시 내게로 내리는 이유는... -세례(洗禮) 내리는 빗물과 수직으로 내달리며 이제껏 가두었던 진실의 땀을 마음껏 흘린다. 태양에 말라 지친 심성(心性)의 눈가를 촉촉이 적신다. 사막의 선인장처럼 벗어던지는 나의 잎. 일생에 한번뿐인 노아의 홍수처럼 증오하는 모든 자취를 기별없이 씻어 버린다 비가 그친다 짧았던 생(生)을 마치고 발현(發顯)하는 비의 영혼. 또 잊혀져 시들어 버릴 빗살무늬 약속들.

2πr[20] 호수을 따라 돌며

호수을 따라 돌며 박원주 푸른 호수가 맑은 하늘이 내려와 고여있다 호숫가를 따라 굴러다니는 조약돌을 밟으며 펼쳐진 호수의 크기를 가늠해 본다 바람을 따라 일렁이는 물결은 복조리가 쌀을 일렁이듯 열심히도 대지를 때리고 있다 눈부신 햇살이 찰랑거리며 수면에 반사되자 갖혀져 있던 나의 경계가 딱딱한 눈을 뜬다 바다... 이 좁은 산맥 외톨진 곳에도 그 숨소리가 고동치는 대양의 바다. 바늘에 고래라도 잡을 듯이 내가 낚시추를 던지는 것은 그 넓은 숨결이 한없이 그리워서리라 내가 이 긴 호숫가를 마다하지 않고 돌아오는 이유도 드넓은 바다를 돌았다는 동경이 착각이 되기 때문이다 철썩이는 파도가 고이는 외진 숲길 그속에서 미역처럼 붙어서 휴식을 취한다 이 푸른 바다에 사는 생선의 맛이 그리워서 삽겹살이라도 구우며 구..

2πr[19] 진화의 믿음

진화의 믿음 박원주 무에서 유가 생기자마자 곧 진화가 시작된다 열역학 제2법칙을 거스르는 열역학 반역의 법칙. 거대한 우주는 세포를 만들기 위한 준비물을 모은다 아미노산 DNA 미토콘드리아 핵 그따위들. 생명이란 마법을 세포에 걸자 세포는 스스로 기어 다니며 놀아 쌌는다 배가 고프면 옆의 놈을 잡아먹을 줄 아는 기특한 진화. 그래 이제 아메바를 벗고 나로 진화하는 거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재일지니. 단세포는 다세포로 핵융합을 시도한다 어느새 물속을 유유히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의 창조 아니 진화. 물속의 푸른 낭만도 진화를 꿈꾸는 고기의 야망을 꺽지는 못했다 H2O에 실증이 난 고기들은 즐거웠던 부푼 부레를 버리고 알록달록한 패션감각을 가진 개구리가 되기로 작정을 한다 물의 압력에 짓눌려 살 필요도 없..

2πr[18] 맹이 누나야

맹이 누나야 박원주 우리 옆 마을에는 맹이 누나가 산다 외할머니 댁을 방문할 때면 언제나 해맑은 맹이 누나 돈을 달라는 듯 공손히 손을 모을 땐 난감한 듯 쳐다볼 밖에 어린 나는 별도리가 없었다 가끔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춤을 출 때면 웃어야 할지 도망을 갈지 난감해 했었다 정상이 아닌 정상을 향한 우리의 몸부림 속에 낙오의 딱지를 붙이고도 즐겁게 인생을 살아가는 누나. 돌아오는 길 좁은 골목길에 아직도 앉아서 하루가 가는 걸 누나는 또 지켜보고 있다 무력한 자신을 알기는 할까 알 수 없는 신의 뜻이 원망스럽긴 할까 아니면 매정한 세상에 억장이 무너질까... 웃으며 웃음짓는 주름진 눈가 떡 벌어진 입에서 침이 주르륵 흐른다 나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 침과 함께 내 눈물도 흘러 내린다 정상을 향해 오를 수없는..

2πr[17] 물의 목소리

물의 목소리 박원주 흐르던 물이 침묵하다 고요한 물들을 잠깨운다 가로 세로의 물이 만나 고요하게 울리는 소리의 숲. 투명하게 숨어있던 목소리들이 무지개처럼 나뉘어 흘러내린다 고요히 퍼지는 물. 과감히 떨어지다 요염하게 패이는 물. 천방지축 말괄량이 튀어올라 구르는 물. 오랜만의 봄비에 자신을 알리느라 작은 소리들이 소란스레 분주하다 투명함에 잊혀졌던 그들의 얼굴. 내 삶속에 지나간 추억의 방울들이 튀어 오르는 물방울처럼 스치며 지나간다 고요한 밤의 동굴에 누워 저마다의 소리를 따라 숨겨진 얼굴을 그리어 본다

2πr[16] 시장한 시장

시장한 시장 박원주 내가 가끔 다니는 버스편에는 문도 없이 왁자지껄한 분주한 시장이 있다 그 곳에는 내 심장을 새롭게 뛰게 하는 갓 무쳐진 삶의 시장함이 있다 그 곳에선 주름 많은 할머니도 열심히 장사란 걸 하기에, 찬송가를 틀며 바닥을 기는 아저씨의 돈통도 채워져 가는 곳이기에, 이 젊은 가슴이 주욱 펴지며 생의 눈망울이 초롱 커진다 뜨거운 일상의 증기 속에도 나를 반겨주는 순대가 사는 곳. 불어 터져가는 잡채를 안은 순대는 흘리는 피도, 죽어버린 내장도, 심지어 내 고독까지도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생의 소중함이라 외쳐 댄다 클래식하게 찐하게 울리는 번데기의 냄새. 주글주글한 내 마음의 시름도 구수한 번데기 국물마냥 시원스럽게 펴진다 가판대 모여 앉아 수다 떠는 새큼한 다래들은 시들어가는 세상 ..

2πr[15] 오솔길 단골 손님

오솔길 단골 손님 박원주 이 고요한 시골 밤중 말없는 오솔길은 거니는 내가 단골인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어릴 적 산딸기 따먹던 가벼운 발걸음과 세월 속 풍파에 지친 발걸음의 무게를 다르게 느끼면서 다독거리고 있을까 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제 빛깔이 다르듯 이 작은 시리우스 내가 남긴 흰 발자취를 다녀간 수많은 걸음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까 앞서 걸어간 훤칠한 공룡의 큰 발자국. 말없이 다가서서 손끝으로 쓰다듬어 본다. 나비날고 들꽃잎 떠돌던 길에 지친 발을 띄우고 눈물로 발을 씻기던 마리아의 머릿결 따라 이 밤중 외딴 오솔길을 반딧불과 떠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