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은 범행장소에 다시 나타난다.
그 누군가가 일어난 사건의 범인이라면 말이다.
#1.11 '누군가'에 얽힌 비밀
아침 일찍 제이 아저씨께 문병을 갔다. 뒤숭숭한 마음이 아저씨를 보면 괜찮아질까 해서이다. 하지만 무심히 누워있는 아저씨의 표정을 보니 도리어 책임감이 밀려와 부담스럽다. 괜히 시퍼란 놈에게 왜 단호히 "NO!!"라고 못했을까하고 괜히 후회도 밀려왔다.
"휴..아버지께선 별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네요."
제이 아저씨의 하나뿐인 딸 제인이 옆에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이 아저씨의 사고후부터 정성스레 병을 간호하는 효성스러운 딸이다.
"네~.간호뿐아니라 마음 고생이 심하시겠어요. 제가 별로 도움이 못되어드려서 죄송하네요."
"별말씀을요. 이렇게 자주 와주시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데요머."
제인은 정성스레 제인 아저씨의 향기를 간호하고 있다. 향기가 저렇게 누워있는데도 몸이 시들지 않는 것은 제인이 그만큼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저..제이 아저씨 서고 좀 봐도 되죠? 그냥 아저씨 글들이 그립네요."
"네. 물론이죠."
나는 아저씨의 서고를 괜스레 뒤적거려본다. 옛날의 인기있었던 '씨앗비문기'부터 여러 책들이 꼿혀 있다. 그리고 아저씨의 책상에는 생명의 씨앗을 날짜별로 정성스레 기록한 보고서도 놓여 있었다. 나는 보고서를 무심결에 들고 훑어보았다. 종이에는 습도와 온도, 비문의 최상위 글자등 여러 자료들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기타란에는 특별히 메모처럼 끄적거린 흔적들이 보였다. 그런데 유난히도 많이 '누군가'라는 글자가 눈에 띄였다. '누군가 건드렸다. 누군가 되돌렸다. 누군가 땅을 판 흔적이 보인다.'등등 말이다. 아마 그 누군가는 시퍼였겠지? 그런데 아저씨는 그 누군가가 시퍼였던 걸 알았을까? 시퍼는 분명 아저씨에게 접근을 해서 정보를 얻으려 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시퍼는 나와는 달리 아저씨에게는 존재를 숨겼거나 말을 해도 협상이 잘 안되었을 것이다. 제이 아저씨는 정말 말그대로 고지식함의 대명사이니 말이다. 옳지 않은 일에는 눈하나 까닥 안하시고 돌아서는 분이시니까. 그렇다면 제이 아저씨는 시퍼의 존재를 몰랐을 가망성이 높아 보인다. 그런데 왜 시퍼는 아저씨를 그때 죽이려 했을까? 어짜피 아저씨는 시퍼의 존재를 몰랐다면 말이다. 그렇게 급하게 서둘러서 죽일 정도로 아저씨가 벌인 일은 없어보이는데 말이다. 매일 연구만 하는게 다인데 뭐가 급했을까? 결국은 자신의 정체가 탄로나는 과정이 진행될텐데 그게 그렇게 조급한 일이였나?..
"근데 제인씨?"
제인은 머슥한지 나를 보며 말했다.
"어머. 젊은 분한테 제인씨라고 들으니까 조금 느낌이 이상하네요..그냥 편하게 제인이라 부르세요. 저도 아버님께 자주 들어서 저보다는 나이가 많은 것쯤은 알아요. 그냥 편하게 말 놓으세요. 그래야 저두 편하죠."
"네. 제인...."
계속 씨란 말이 뒤에 붙으려 해서 때놓으려 애를 먹었다. 제인은 그게 우스운지 킥킥대는 바람에 좀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냥 제인이라 불러주세요. 자주 보는 사이인데 편하게 지내요 우리. 그럼 저두 리겔 오빠라고 해도 되죠?"
순간 제인의 당돌함에 당황했다. 말을 그렇게 쉽게 놓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음..음...그러죠."
"그러죠가 뭐예요. 그래. 그렇게 말해보세요."
제인은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내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그...글..애..."
나는 분명 제인에게 물어볼게 있었는데 이 당돌한 아가씨때문에 무얼 물어봐야 할찌 까먹어 버리고 말았다.
"뭐 물어보실려고 절 부르신거 아닌가요? 리겔 오빠?"
리겔오빠...허걱. 갈수록 태산이다. 이 명문가문에서 이런 당돌한 아가씨는 어디서 났담. 제인에게 신경을 쓰다 보니 당황해서 아저씨에 대해 물어보려했던 것을 까먹어 버렸다. 그러다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응. 제인. 그런데 아저씨가 최근 들어 씨앗의 비문 연구에 대해 특별하게 하신 말씀은 없었어?"
제인은 곰곰히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저두 자세히는 잘 몰라요. 제가 평소엔 아버지께 잘 안오는 편이라서요. 그치만 아버지의 최근의 집필중인 서류를 정리하다가 특이한 사실을 봤어요."
"그게 뭔데?"
제인은 내가 호기심어린 눈으로 자신의 눈을 쳐다보는 것이 신기한지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최근에 해독한 비문의 내용은 씨앗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조만간에 책으로 출판할 내용이라서 제가 대충은 읽어봤어요. 내용은 동산 고목에 대한 전설이 실재였다는 것인데요. 비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아버지께서 동산 고목의 실제 크기등을 측량을 하셨나봐요. 뻣어나온 고목 뿌리 화석등을 바탕으로 측량을 해서 엄청나게 큰 나무라는 사실을 검증하셨죠. 그런데 그것외에도 생명의 씨앗에 대한 몇가지 학설을 주장하셨는데 그건 잘 아실꺼예요. 좀 들어보셨죠?"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대꾸를 해주었다.
"1년 자전주기설, 깊이 불변설, 위치 고정설, 양분 공급설..."
"됐어요. 잘 아시네요..모두 아버지께서 젊은 시절에 열심히 주장하신 학설들이죠."
순간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듯한 느낌에 괜히 아는척을 해서 기분을 나쁘게 한건 아닌가 머슥했다. 하지만 제인이 이어서 열심히 설명을 시작하는 것을 보고 이내 안심을 했다.
"그 이론들을 이번에 검증된 자료로 확실히 이론으로 못박으시려 하셨나봐요. 그런데 계속 누군가가 방해를 했는지 데이타가 오류가 생겼죠. 나중에 땅을 판 흔적등을 보고 누군지 알아내려고 잠복도 하신적도 있었데요. 하지만 깊이는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다고 확신을 하셨거든요. 다른 것은 건드릴수있어도 말이죠. 왜냐면 그 씨앗의 깊이가 나머지 학설들을 뒷바침했기 때문이죠. 씨앗이 묻혀버린다면 자전을 하는지 위치가 고정되어 있는지 양분을 잘 공급받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죠. 그리고 아시다시피 그 생명의 씨앗은 바위에 묻힌거나 다름없죠. 그 묻힌 흙은 밑으로 들어갈수로 단단한 구조이기 때문이예요. 그런데 아버님의 조사기록을 보면 씨앗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어요. 그래서 아버님의 책 출간이 미뤄지고 있었던 거구요. 아버님은 깊이까지 인위적으로 건드려 진건지 고민하신거 같아요. 여기저기 고민한 흔적의 메모가 많아요."
"그래요?"
나는 신기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인이 또 피식거리는 걸 보고 순간 또 말이 잘못나왔음을 알았다.
"리겔 오빠. 안되겠는걸요. 아님 제가 그냥 누나하는 수가 있어요. 잘생긴 오빠 포기하고 귀염받는 동생이 되고 싶으면 그렇게 계속 말 높여서 부르세요.하하"
"어..미안.."
나는 당돌한 숙녀와 오래 있으면 초면에 된통 당하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빨리 자리를 뜨자고 생각이 들면서도 나는 순간 아저씨가 중요한 자료들은 어디에 두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론 책들을 써내시기전에 초고같은 집필이 있을 텐데 말이다.
"저기 제인. 궁금해서 그러는데 아저씨가 집필하실때 중요한 초고나 자료들은 어디에 두시지 알아? 여기는 책이나 데이타 자료들 밖에 안보이는거 같은데?"
"저도 아버님께 자주 찾아뵙질 못해서 잘모르겠어요. 아버지께 오면 낙서장 같은 자료들만 봐서.. 중요한 자료들을 어디에 정리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
"그래? 음..한번 찾아봐줘. 그리고 찾으면 제인이 꼭 숨겨둬"
"왜요?"
숨기라는 말에 고개를 갸우둥 어리둥절해하는 제인을 보고 시퍼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그냥 접었다. 괜히 알아버려서 두려움만 느끼는 것보다는 그냥 모르는게 약이다.
"아냐.. 그냥. 잘 보관하라고."
"네..."
그런데 제이 아저씨의 정리된 초고록들은 어디에 있을까? 아 그런데 무엇보다 씨앗이 가라앉는지 빨리 가서 살펴봐야겠다.
"제인 그럼 나먼저 가볼게. 정말 씨앗이 가라 않고 있는지 확인을 해봐야겠어."
"네. 그러세요. 다음에 또 뵈어요."
"응. 그럼 수고하고 또 보도록 해."
"네. 조심해서 가세요."
그런데 제인은 가려는 나를 황급히 부르며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기록자료는 필요없어요? 이게 있어야 씨앗이 가라않는지 뜨는지 알수 있을텐데?"
"아니야. 저번에 간 기억이 있어.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대충보면 알 수 있을꺼야."
"아..네."
"그럼, 아버님 간호 잘하고 궁금한게 있으면 또 올게. 수고해"
"네. 잘다녀오세요."
나는 제이 아저씨의 문병을 서둘러 마치고 베델에게로 가기로 했다.
베델에게로 가는 길에 잎만 커다란 튤립을 보았다. 튤립이 잎이 이렇게 컸나하고 의심이 들 정도였다. 보통 튤립은 대부분 꽃이 큰걸로 아는데 말이다. 지나는 코스모스길에서는 꽃만 커다란 코스모스가 있었다. 향기를 보니 분명 코스모스다. 코스모스는 줄기가 상당히 길게 자라는데 저렇게 지면에 붙어서 제비꽃처럼 자라는 녀석은 처음 본다. 베델집에 다와 갈때쯤 가시만 있는 장미를 보고 순간 찔레인 줄 알았다. 분명 나와 같은 장미향기인데 오늘따라 저 녀석들이 뭘 잘못먹었나? 내 눈을 비비보았다. 베델에게 다왔군.
"베델~베델! 나 리겔이야."
"응~.오늘은 내가 늦잠을 자버렸네. 운동하자고 온거지? 오늘은 어디로 갈꺼야?"
베델은 언제나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친구이다.
"응. 운동이라면 운동이고. 오늘은 잃어버린 동산에 빨리 가 봐야해. 확인할게 있어서 말이야."
"확인할꺼라니? 뭐 말이야?" 베델이 궁금한듯 물었다.
"제이아저씨의 딸 제인 기억하니?"
"한번 본적은 있어. 그런데?"
"제인이 한가지 정보를 줬는데 생명의 씨앗이 가라앉고 있다고 해서 말이야. 정말 그런지 확인을 해봐야겠어."
"그래? 정말 그렇다면 대단히 특이한 사건이 되겠는걸. 불변한다고 믿었던 씨앗이 변한다면 특종감이지!"
베델과 나는 잃어버린 동산으로 급하게 가보았다.
입구에는 어느때처럼 시를 쓰고 노래하는 향기들이 가득했다. 서둘러 비탈길을 지나 고원에 도착했다. 헤라 아주머니께는 나중에 인사드리기로 하고 우선 중앙의 섬으로 헤엄쳐갔다. 베델은 제이 아저씨를 배를 타고 갈꺼라고 우겨서 우선 배를 풀어서 천천히 오기로했다. 나는 먼저 생명의 씨앗이 묻힌 중앙 섬에 도착했다. 어느때와 마찬가지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닭이 알을 품듯 말이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씨앗은 저번보다 조금더 깊이 묻혀있었다. 베델이 늦게나마 도착했다.
"오~생명의 씨앗이 가라앉았어.! 신기한 일도 다있군!"
나는 생명의 씨앗이 점점 땅속으로 가라않는 걸 보니 걱정이 마구 몰려 왔다.
"신기한 일이야! 특종감인걸. 빨리 가서 기자단에게 알려야겠다. 기사를 비싸게 팔아야겠어. 하하 "
"그래. 그렇게 해. 난 좀더 씨앗을 살펴보고 갈게."
"나중에 내가 밥 한번 살게. 수고하게 친구!"
"응. 있다봐~"
그런데 생명의 씨앗은 무사한 것일까? 정말 땅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니겠지? 혹시 시퍼란 놈이 건드려서 그런건 아닐까? 아니야. 생명의 씨앗은 섯불리 건드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말이다. 잘못건드렸다가는 그 엄청난 에너지압력으로 다 타버릴테니까. 그런데 혹시 시퍼도 씨앗이 가라 앉고 있는 걸 눈치챘을까? 그럴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제이 아저씨에게 정보를 빼낸 간사한 놈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씨앗이 가라앉기전에 수를 써서 훔치려고 시도한게 틀림없다. 하지만 씨앗의 자기장같은 에너지는 엄청나니 섯불리 움직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생명의 샘에 기계들을 들고 오는건 '나잡아봐라'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씨앗이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 대처해야 할까. 혹시 씨앗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건 아닐까 고민이 됐다. 이때 제이 아저씨가 깨어나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아쉬움이 남았다.
'엇..'
순간 씨앗주변을 배회하는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시퍼가 나에게 준 향기구슬이 무슨 존재감을 알리듯 밝아졌다. 시퍼인가? 이녀석은 어디까지 향기나라의 기존 계를 혼란시키고 있는거지?
"크크크~"
"누구냐!"
"이제 초면도 아닐텐데 서운하게 왜이러나..크크크"
시퍼구나. 이 느껴지는 기운만 봐도 시퍼임을 알지만 이 생명의 씨앗 근처까지 제집 드나들듯 할줄이야..
"나와의 약속은 왜 어기나?왜 나의 손을 뿌리치는건가?"
그러고 보니 하늘에 보름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퍼가 나에게 약속의 유예기간으로 주었던 그 보름달.
"왜 바보같은 군중들처럼 살려하지? 난 자네가 똑똑해서 내 말과 계획쯤은 알아 들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왜 스스로 어리석은 채 하는건가?"
"..."
난 다시 시퍼의 말에 틀리다고 확답을 던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맞다고는 더더욱 아니다.
"난 더 많은 인간계의 지식들을 향기나라에 들여놓고 있어. 일련의 사건들만 봐도 나의 현명한 능력을 알텐데 더 몸으로 격어야겠나? 바보처럼? 크크크. "
"제이 아저씨는 너의 소행이냐?"
"머 뻔한 건 좀 묻지 말게. 나의 정책상 미션이 달성되면 그는 더이상은 불필요한 존재야. 나에게 마이너스가 되느니 0의 상태로 사라져주는게 나아. 아니그런가?"
"그게 말이되는 소리야!"
"너도 저런 꼴 나고 싶지 않으면 나에게로 와."
"말도 안되는 소리 그만해!"
"난 부품들을 모으고 있네. 큰 패러다임의 부품들을 말이지. 내뜻대로 안되는 것들은 모조리 없애버릴 계획이야. 심지어 내가 그리는 큰 그림이 그려지지 못할 바에야 향기나라가 통채로 사라져 버리는 것도 이 식물계에 유익할 수도 있지. 크크크. 어때 나와 함께 큰 걸작품을 만들어 보겠나? 아니면 다같이 사라져 버릴텐가? 응? 하나씩 하나씩..크크크. 난 나의 존재감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것쯤은 알아뒀음해. 어짜피 유기물들은 다 썩어지고 냄새만 풍기다 거름이 될 테니까. 크크크. 나의 큰 그림이 계획대로 안되는거 같아 은근히 화가나려해. 그냥 팍 다같이 사라져 버리고 싶단 말이지. 빅뱅때 처럼 한순간에 펑하고 깔끔하게 말이야. 크크크. 그렇게 되기전에 내게 도움을 주는게 자네나 향기나라에 유익할꺼야. 알아듣겠나? 아니면 불행한 블랙홀속으로 이 향기나라를 모조리 집어 넣어버리고 말테야. 스릴있게 하나씩 하나씩 ..크크크."
"미친 놈!"
"그리고 너! 제이 그놈과도 친할텐데. 이 씨앗비문 해독한 자료를 어서 넘기라고 해. 내가 그놈에게 설득을 할래도 도통 말이 안통하는 놈이라서 말이야. 어디다 감춰놨는지. 내놓으라고 해. 그놈이나 그 딸이나 무사하길 바란다면 말이야. 알았지? 난 그 씨앗의 에너지가 필요하단 말이야. 저 하늘에 빛나는 태양처럼 쓰고 싶은데 말이야. 그게 번개처럼 그냥 아직은 내가 컨트롤이 안된단 말이지. 가까이에 있어서 애만 타고 말이야. 크크크."
"개수작 부리지마!"
"개수작이라니? 나의 이 숭고한 작업을 그렇게 정의해버리다니. 크크크. 나의 계획대로 안되는 순간이 향기나라가 사라지는 순간인줄 알아둬! 난 어짜피 쓸모없는 향기들은 다 없애버릴 계획이였고 이미 실현하고 있지. 남아있은 쓸모있는 향기들도 내 뜻대로 안된다면 어짜피 똑같이 처리해버리면 되지. 크크크. 결국에 나의 뜻이 남거나, 공허가 남거나 둘중하나겠지. 크크크. 저 공허한 엔트로피의 메아리처럼 말이야. 난 자네가 나의 신실한 애마가 되어 주길 바라네. 리겔. 알아듣겠나? 이 철없는 향기야? 난 꽉 막힌 향기를 싫어 한다는 것쯤은 좀 알아둬. 그리고 성질이 급하고 더럽다는 것도. 알겠어?"
어느새 땅속에서 시퍼의 칡넝굴이 나의 목을 휘감아 조르며 나를 호통치고 있었다.
"으으윽. 놔! 이거 놔!..으으윽."
시퍼의 과격해진 행동에 나는 어찌 할바를 몰랐다. 나의 장미 가시로 대항할수도 있지만 워낙 향기조절능력이 강해서 나의 나약함만 한탄할 뿐이다.
"너도 쓸모없는 단기적인 존재가 되어 사라지기 싫으면 저 제이 놈의 씨앗설명서나 들고와. 내가 찾기전에!. 알아듣겠어? 긴말은 안해. 짜증나니까. 내가 인내심이 없는건 잘 알테니까 날 시험하지마! 알겠어? 다시 보름의 시간을 주지. 다가오는 그믐달까지 씨앗설명서나 친절하게 착하게 들고 나와. 착한 리겔! 크크크"
"철퍼덕~!"
억울했다. 나를 부품처럼 대하는 녀석에게 분통이 터졌다. 저 녀석을 제어할 방법이 없는건가. 어떻게 이 생명의 씨앗에게 까지 다가온 걸까..
"그런 화나는 눈빛은 다른 향기한테나 지어. 애처로워 보이니까. 크크크. 그럼 그믐달이 뜰때 죽음의 계곡에서 보게나. 그때까지 무사하고. 크크크"
꿈틀대던 땅이 다시 조용해지고 시퍼는 또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나만 덩그런히 놔둔채..
그런데 씨앗설명서는 뭐지? 나도 모르는걸 어떻게 들고 오라는 거야. 젠장.
아.. 문제는 시퍼를 저대로 내버려뒀다가는 향기들이 몰살당할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어떻게 이룩한 향기나라인데..큰일이다. 향기나라의 위협은 식물계의 위협으로 번질줄도 모른다. 저 시퍼를 막아야하는데 나는 시퍼의 이 당돌한 접근마저 의아할 뿐이다. 어떻게 죽음의 계곡에서 여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날수가 있지? 가서 가엘 소장님께 시퍼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법부터 물어봐야겠다.
울쩍한 마음을 헤라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리며 달랬다.
"헤라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그래 리겔. 요즘에는 너가 제이 아저씨보다 자주 보이는구나."
"네. 제이 아저씨께서 사고를 당하시는 바람에요."
"그래? 어쩌다가?"
"자세한 건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그렇게 하려무나. 제이 아저씨가 우리 집에 놀러와서 글도 쓰시고 하던때가 어제같은데..안됐구나. 그럼 안부전해다오"
"네. 알겠습니다. 아주머니도 건강하세요"
"나야 건강이 넘쳐서 탈이지. 너도 빨리 장가가거라."
"예예. 알겠습니다. 또 뵐게요"
"그래~"
역시 생명의 샘에 들어가 물속의 황홀한 은빛 풍경을 보니 나의 복잡한 마음이 한결 나아지는 듯했다.
그런데 아까 그 이상한 아니 괴상한 튤립들과 코스모스가 신경이 쓰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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