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의를 정의하지 못한채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다.
이 싸움에서 내가 이길지 또 언제 끝날지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1.20 승리의 끝
어둡고 후덥지근하고 신음소리가 울리는 동굴. 시퍼가 있는 그 곳. 우리는 그곳에 다시 발을 디뎠다.
"오빠. 뭐하려는지는 모르지만 빨리 찾아서 나가자. 시퍼가 언제 또 들이 닥칠지 몰라. 냄새도 너무 고약해.."
"난 시퍼를 찾으러 왔어. 정확히는 시퍼가 우릴 찾아줘야지. 후후."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차차 알게 될꺼야."
"몰라 시퍼만 안봤음 좋겠어."
나는 저번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동굴을 걸었다. 저번에 가엘소장님이 시퍼에게 당한 곳은 아주 뜨거웠는데 이곳은 그곳보다는 시원했다.
"이 근처에 생명호수를 저장한 듯해. 갈수록 동굴이 점점 서늘해 지고 있어."
"응. 어디서 헤라 아주머니 향기도 나는 듯해."
동굴의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푸른 호수가 나타났다. 생명의 호수다.
"쉿!"
나는 제인이 반가움에 소리를 칠까봐 미리 소리를 막았다. 약하게 동굴에 바람소리만 울렸을 뿐 우리의 기척을 최대한 숨겼다.
"생명의 호수에는 분명 바이러스에 중독된 향기들을 위해 물을 나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우리는 물끄러미 생명의 호수물 웅덩이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저쪽에서 누군가가 물을 뜨러 오고 있었다.
'아니 헤라 아주머니??'
"오빠. 헤라아주머니야!"
"응. 그러네. 근데 어떻게 아주머니가 여길?"
순간 생명의 호수물을 모두 쓸어가버린 그때의 상황을 생각해보니 헤라아주머니도 쓸려갈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지? 우선 호수속에 다른 누군가가 없는지 호수속을 들여다 봤다. 다행히도 이 넓은 호수속에는 어떤 향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물속의 물풀들 사이사이로 향기를 숨기며 아주머니에게로 다가갔다.
"아주머니!"
"응?? 리겔? 리겔이니? 너가 여길 어떻게 온거니?"
"이유는 차차 설명해 드릴게요. 근데 뭐하고 계세요?"
"말도마라..뜬금없이 여기에 끌려와서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했더니..글쎄 저 시퍼란 놈이 향기들을 잡아 먹고 있지 않겠니? 여기 물속의 향기들도 다 시퍼에게 당했단다. 나도 이제 죽겠거니 했는데 글쎄 향기구슬들을 관리시키더구나. 에휴.."
"향기구슬들을요?"
"그래. 저녀석은 드라큐라처럼 향기 구슬로 자신의 향기를 연명하더구나. 저기 뜨거운 용암속에서 살려면 그방법 밖엔 없겠지. 그렇다고 향기를 포기할수 없으니.."
"네. 저희도 봐서 알고 있어요?"
"너희도 못볼걸 봤구나.."
"그런데 향기 구슬들을 어떻게 관리해요?"
"향기 구슬들이 뜨거움에 향기를 잃지 않게 차가운 얼음동굴에 보관하는데 시퍼가 향기의 구슬을 먹을때면 여기 생명의 호수물에 녹이고 씻어서 원래의 향기 구슬로 가져다 준단다. 6일에 한번씩 가져다 줘야하니 오늘도 이렇게 녹이고 있단다. 내 풀쌍한 친구들의 향기구슬을 말이야.."
"몸쓸 시퍼. 제가 곧 가서 처치할 꺼예요. 아주머니께서도 좀 도와주세요."
"네가 어떻게 시퍼를 처치한단 말이냐? 그놈이 먹은 향기구슬만 해도 어마어마한데.. 힘이 더욱 강해졌을꺼야."
"알아요. 녀석이 강할 수록 제겐 더 유리해요."
"그게 무슨 말이냐?"
"다 방법이 있어요. 우선 얼음창고에 있는 향기구슬들으 모두 여기 호수로 가져와 녹여주세요. 가능한한 빨리요."
"그래. 그건 내가 여기서 계속 하는 일이여서 어렵지 않다만..난 네가 걱정이 되는구나. 리겔.."
"제 걱정은 마세요. 전 이 향기나라에서 제일 전투력이 높은 장미과잖아요."
"그래도 너는 아직 어리고 저 시퍼는 많은 싸움을 해서 무척 강하단다."
"네. 저도 알아요. 우선 시퍼가 어디있는지 가르쳐주세요."
"음.."
헤라 아주머니는 우리를 사자굴로 보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가르쳐줘야할지 말아야할지 걱정을 하는 눈치였다.
"어서요! 한시가 급해요!"
"그래. 알겠다. 여기 호수는 가장 낮은 곳에 물을 저장해 놓았지. 여기서 너희가 오던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점점 동굴이 넓어지면서 큰 광장이 나올꺼야. 거기에서 큰 석주가 두개 놓인 밝은 동굴쪽을 보면 뜨거운 용암의 기운을 느낄수 있을꺼야. 그 동굴속에 시퍼가 있지. 하지만 그 동굴에 너희가 들어가면 절대 안된다. 용암이 너무 뜨거워 향기가 점점 증발해 버리거든. 나도 한번도 들어가 보지는 않았단다. 부디 조심하거라."
"네. 아주머니는 향기의 구슬을 물풀로 묶어서 저기 호수동굴 입구에 좀 놔두세요. 그리고 시퍼에게 주기로 한 그 향기 구슬은 제가 가져갈게요."
"그래. 그렇게 하려므나. 그리고 이 내 물풀 향기망토를 가져가거라. 용암에서 그나마 네 향기를 지켜줄 거다."
"네. 고맙습니다."
우리는 아주머니의 말대로 우리가 왔던 길로 되돌아 올라갔다. 가엘소장님이 당하셨던 질퍽질퍽한 동굴바닥도 걷고 벌레들이 우굴거리는 소굴을 지나자 점점 동굴이 넓어지면서 큰 광장이 나왔다.
"오빠. 이젠 너무 뜨거워. 이쪽으로 가면 시퍼가 우리 향기를 맡을텐데 어떡하려구 그래.."
"걱정마. 시퍼가 나타나도 다 방법이 있지."
우리는 용암이 흐르는 동굴의 큰 석주 기둥을 보았다. 그 위로 용암들이 흘러 시퍼가 있는 용암동굴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오빠는 이 시퍼의 아지트를 폭파시켜서 시퍼가 힘을 쓰지 못하도록 할꺼야. 방법은 저 석주 기둥을 무너트리는 거지!"
"무슨 소리야 저 석주기둥이 무너지면 용암이 우리 쪽으로 쏟아질텐데? 또 시퍼가 놀라 뛰쳐나올껄?"
"바로 그거야. 자 이 물풀 향기망토를 우선 입고 있어. 그리고 저 숙주기둥이 무너지면 아까전의 그 호수로 달려가는거다!"
나는 나의 장미가시 활시위 끝에 향기구슬을 달고 용암이 흐르는 석주 기둥 두사이 조준했다.
"슝~!"
나의 화살은 동굴의 음산한 공기를 가르며 석주기둥아래 사이를 맞췄고 향기 구슬은 석주기둥에 박히면서 깨어졌다.
"펑~!"
펑하는 소리와 함께 석주기둥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금 간 사이로 용암들이 흘러내리자 석주 기둥은 촛농이 녹듯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동굴은 순식간에 용암천지로 용솟음 쳤다.
"누구냐!!!!"
시퍼가 도끼눈을 하며 용암동굴에서 나와 우리쪽을 째려봤다.
"튀어!"
시퍼의 덩굴손이 우리를 향해 뻗어왔지만 튀는 용암에 그만 짤리고 말았다.
"이..이놈.. 리겔..네눔이 여기가 어디라고!! 이런 난장판을!!"
우리는 부리나게 원래의 호수입구쪽으로 도망쳤다. 용암도 시퍼도 우리를 뒤쫒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용암이 흐는 기류때문에 좁은 동굴로 피하기가 생각보단 쉬웠다. 우리는 곧 호수동굴 입구에 도착했고 나는 앞에 놓인 향기구슬 물풀꾸러미를 들고 높이 위의 난간으로 올라가 숨었다.
"아하하. 바보같은 녀석들. 여기가 동굴의 끝인걸 몰랐나 보지? 내가 너희들 보다 여기 지리를 모를거같으냐? 어서 썩 나오지 못햇!!"
분노에 가득찬 시퍼의 목소리가 동굴을 쩌렁쩌렁 울렸다.
"오빠 이제 우리 어떻게 해."
"아직도 시간이 필요한데.. 아참! 데네브가 준 스위치가 있지!"
나는 데네브가 준 스위치를 켰다. 순간 동굴 저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악.. 이 놈들 무슨 개수작이야! 아흐!"
데네브의 네트위크 교란 스위치는 역시나 효과가 있었다. 아래로 용암들도 점점 흘러 차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수동굴입구쪽으로 흐르던 용암들은 호수의 차가운 물과 만나 호수 입구에 굳어져 입구를 막아버렸다. 그리고 점점 호수입구로 몰려온 용암들은 호수의 찬기운에 조금씩 식어 굳어져갔다.
"이것들 다 뜯어 먹어버릴테다!!!"
네트워크의 교란과 뜨거운 용암기운때문에 시퍼는 우리의 향기를 잘 알아채지 못했지만 점점 우리쪽을 향해 다가왔다.
"크크크. 그래도 이제 남은 곳은 저기 뿐인데.. 크크크. 이제 어떡하지? 너희들의 보드라운 향기가 느껴지는 구나!"
호수 동굴 입구위에 작은 난간속 우리의 은닉처를 시퍼가 알아버렸다. 제인이 두려움에 몸을 떨었지만 나는 제인에게 두루마리를 건네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호수동굴의 입구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갑자기 용암으로 갇힌 생명의 호수가 용암의 뜨거운 열기에 끓으면서 동굴안이 폭발 직전에 이른것이다!!
"저깃네. 요것들. 하하하!! 내가 너희 향기를 용암속에 스프로 만들어주지. 하하하."
그때 나는 향기구슬들을 장미가시화살에 달아 호수동굴 입구를 향해 쏘았다.
"슝~~!! 휘리리리릭!!"
나의 화살이 호수동굴의 입구에 꽂히는 순간 향기 구슬들이 줄줄이 깨어졌다.
"펑! 우르르르르 꽝! 꽝!"
굉음과 함께 호수동굴이 폭발하면서 깨어진 바위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기시작했다.
"제인 지금이야!"
"응!!!알겠어!"
용암에 갇혔던 생명호수가 폭발하면서 동굴의 사방으로 용암들이 터져나왔다.
"슈융~!"
우리는 생명의 섬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멀리서 죽음의 계곡에서 시커먼 연기가 올라오면서 화산용암들이 계곡을 타고 흘러넘쳤다. 번쩍 번쩍이며 번개불도 용암사이를 타고 같이 흘렀다.
'시퍼는 어찌 되었을까? 호수동굴에 갇혔을까? 용암속에 죽었을까?'
"오빠? 괜찮아?"
"어! 너도 괜찮니.."
"아니..여기 너무 추워.."
"그러네.."
"...."
밖은 너무나도 추웠다. 아니 추운게 아니라 모든 것은 얼어 있었다. 생명의 호수물도 나의 시나리오 대로라면 그 압력 때문에 원래 이동했던 물줄기 통로를 따라 이 생명의 섬으로 되돌아왔어야 했을테지만 벌써 생명의 호수는 얼음처럼 딱딱하게 얼어있었기에 다시 이곳으로 올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의 씨앗은 눈이 덮힌 땅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아.. 하늘에서 흰 눈이 날린다.
아름답다.
나의 생각도 흰눈처럼 부서져 내린다.
더 이상은 몸도 마음도 얼어서 움직일 수가 없다.
향기나라의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나의 열기도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향기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끝.
이게 말로 듣던 죽음이라는 것인가?
한번도 당해보지 않았고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던 그 끝을 이제 나도 체험하는 것인가?
그래 오거라. 모두가 같이 죽기에 무섭지 않다. 다만 내가 한 일, 내가 아둥바둥 산 노력의 흔적들이 잊혀지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더 이상은 노력도 없고 향기도 없다.
여기서 향기나라도 끝나는 것이다. 나도 끝나는 것이다.
더이상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는게 후련하기는 하다.
나를 놓는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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